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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표영실

기자명 김최은영

연약함, 그 불안한 감정이 울리는 심금(心琴)

▲ ‘먼집’, oil on canvas, 2006.

확언되지 않은 표현. 사실, 감정이라는 것을 어떻게 계량적 수치처럼 드러낼 수 있는가. 표영실의 그림은 내가 원하는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가 확장된다. 조심스러운 선, 결단력 있는 스침. 선명하지 않아도 분명 실존하는 형체들. 감정적 단어를 충분히 내포한 것이 가득찬 빈 공간. 절대로 낮게 느껴지지 않는 사고 우위의 감정들은 특정한 단어로 확정되어지기 보단 암시만으로도 괜찮을 만한 화면에 부여된 탁월한 특성이다.

팽팽한 화면 속 삐딱한 불안
분명하지 않아 더 풍요롭고
선명하지 않아 더 어우러져

모호한 배경이 유기체처럼 흐르며, 사라지는 중이거나, 아직 남아있는 중이고… 그리고 애잔하다. 애잔하다 함은, 그것이 꼭 무엇을 꼬집어 그런 경험치를 갖고 증명해야하는 것이 아닌 표영실이 이야기하는 무언가를 달리 보이게 하는 아름다운 장치다. 그 모호한 광경은 견고했던 감정의 날이 수그러드는 모습일 수도 있고, 사라지고 싶지만 끝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중간체다. 모호하게 사라지는 것과 모호하게 드러나는 것. 모두 내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신호들. 벽돌처럼 견고하며, 아름다운 색채를 띠고, 연약한 풍선에 의지한 균형을 잡고, 그리고 … 불안하다. 불안은 연약하나 오래된 불안은 딱딱하게 굳었다. 풍선에 매달릴 만큼 가벼울지도 모를 불안은 벽돌처럼 단단하다. 따뜻한 색감이 주는 위안을 담보로 한 불안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 징후는 매우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색면 예술의 일면을 드러낸다. 그러나 뻔한 이야기로 귀결지어 허술한 관람으로 끝내버릴 수 없는 주목성을 띤다. 수수께끼처럼 담겨진 불안한 일면, 우리를 표영실의 작품 앞에 붙들어 놓는 힘.

▲ ‘오래된 불안’, oil on canvas, 2006.

견고한 감정이란 것이 존재 가능하긴 할까. ‘늘’이라는 수사를 달고 살진 않더라도 ‘문뜩’ 정도는 불안한 우리. 특히나 삶의 중간쯤 살아내고 있는 지점이라면 더욱 더 와 닿을 미묘한 감정들. 사전적 의미의 감정들로만 일상을 채워나가기엔 단어의 연약함이 도드라진다. 연약한 감정처럼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중간중간. 일생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동안 개연성 가진 사건과 사건 사이. 그 중간중간 드러나는 확정된 사실이지만 연약한 감정들. 혼돈, 상실, 애잔함, 안타까움, 상한 마음, 잠깐의 발끈. 얄팍한 광기. 오랜 상처의 흉터. 아물지 않는 감정들. 연약하고 연약하다. 연약한 감정들이 어쩌면 바로 오늘의 ‘나’일수도. ‘당신’일수도. 그래서 표영실이 담아놓은 화폭의 미묘한 흔적들이 상흔으로 읽히고, 견고해 보이는 팽팽한 화면 속에서도 삐딱한 불안이 도드라져 보일지도.

표영실의 그림은 유독 미묘하고 예민해서 굳이 단어로 골라내자면 강인함보다는 연약함이, 처절함 보다는 섬세함이 더욱 어울릴 터. 어차피 사전 속 단어만으로 삶을 살아내지는 않는 바. 예술가의 여린 속살 같은 감정의 날이 수그러들고, 정제되어 화면에 안착되었을 때 비로소 인정하게 되는 동의의 감정들. ‘심금(心琴)’도 그 동의가 있어야만 울리고, ‘진정성’도 인정함을 선행해야만 얻어지는 일. 문자가 아닌 그림이라는 단서는 얼마나 더 풍요로운지 표영실, 그이의 그림을 보면서 새삼 깨닫는다. 내가 품은 만큼 보이는 공간, 먼저 그이의 개념이 옳다 믿어야만 허락된 모순된 공간들. 그 속에서 내가 왜 표영실의 모순된 형상에 이토록 가슴이 울리는지 알게 되는 일. 현대미술이란 어쩌면 분명하지 않아 더 풍요롭고, 선명하지 않아 더 어우러지는 한 세상이 되는 일.

김최은영 미술평론가 culture.solution@gmail.com
 


[1393호 / 2017년 5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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