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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스님 비불교적 요소 외면…합리화에만 급급”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7.06.02 09:29
  • 수정 2017.06.02 13:04
  • 댓글 47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기고-‘대행선 학술대회 내용을 비판한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이 6월1일 한마음선원 대행선연구원이 5월19일 ‘대행선’을 주제로 개최한 첫 학술대회의 논문 내용을 비판하는 기고문을 보내왔다. 이제열 원장은 이에 앞서 5월10일 대행선연구원 초대원장을 맡은 이평래 충남대 명예교수에게 ‘대행선연구원장 이평래 교수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보냈었다. 이번 기고문과 관련해 대행선연구원 및 논문 발표자들의 반론이 있을 경우 이를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이제열 원장의 ‘대행선 학술대회의 내용을 비판한다’ 전문

발표 논문들 실망 넘어 우려 수준
이평래 교수 궁색한 논리 되풀이
비불교적 요소를 정법인양 호도
외도 구도기 들어 대행 스님 포장

깨달았다면서 근거 제시는 못해
검증 안 된 ‘한마음요전’에만 의지
경전 구절 선별해 대행 논리 편승
‘지록위마’의 극치를 보는 듯해

대행스님에게 ‘아빠’는 절대자
갈등과 비탄에서 탄생한 ‘대망상’
논문 발표자들은 불교학 오점
사법에 금칠한다고 정법 안 돼

▲ 한마음선원 산하 대행선연구원이 5월19일 안양 한마음선원에서 개최한 첫 대행선 학술대회.
얼마 전 나는 한 교계 신문에 한마음선원이 설립한 대행선연구원의 원장인 이평래 교수에게 연구원장 취임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한마음선원의 설립자이신 대행스님의 가르침이 부처님 불교관과 일치하고 있는지에 관해 물은 바 있다. 하지만 소식에 의하면 이평래 교수는 나의 질의에 즉답을 회피한 채 세미나 장소에서 대행스님을 예수에 비유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고 한다.

이는 이평래 교수를 향해 질문한 나를 비롯해 이평래 교수의 견해를 궁금하게 생각하고 성실한 답변을 기다려 온 많은 불자들에게 실망을 안긴 행위로써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왜 하필 예수인가? 예수와 대행스님의 주인공이 무슨 연관이 있어 예수를 빗대어 대행스님의 가르침을 옹호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를 비롯하여 대행스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빌라도나 가롯유다라도 된다는 말인가? 유대민족이 예수를 인정하지 않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논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대행스님을 사람들이 비판하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데에도 그만한 이유와 논리가 있다. 그런데도 이평래 교수는 이러한 입장은 전혀 도외시 한 채 궁색한 논리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더구나 그 뒤로 접하게 된 이평래 교수를 비롯한 후학교수들의 발표 내용은 나로 하여금 실망을 넘어 한국불교에 대한 우려마저 자아내게 하였다. 이들은 대행스님에 대한 객관적 진실은 외면한 채 이구동성으로 온갖 불교논리를 끌어다 대행스님의 외형을 장식하는 데에만 급급하였으며 대행스님의 가르침이 안고 있는 비불교적 요소들을 부처님의 정법인양 호도하였다. 대행스님은 이제 세미나에 참여한 교수들로 인해 비로소 깨달음을 이룬 선지식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대종사(大宗師)의 반열에 들게 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동안 대행스님을 따르는 추종자들은 물론 외부에서조차도 공식적으로 대행스님의 깨달음 여부를 거론한 적이 없다. 전통적으로 수행자의 깨달음에 대한 인가(認可)는 명안종사나 대선지식으로부터 여법하게 인정을 받아 주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평래교수를 비롯한 후학 교수들은 만인 앞에서 대행스님을 깨달은 선사로 호칭함으로써 전통과 관계없이 대행스님은 명실공이 깨달음을 얻은 대선사가 되었다. 참으로 대행스님야말로 불교 전통속의 선지식이나 스승들에 의해 수행력을 인정받지 못한 대신 교학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 깨달음을 인가 받게 되는 최초의 비구니가 된 셈이다. 사자상승(師資相承)에 의한 서릿발 같은 점검을 통해 인가(認可)가 주어지는 법인데 교수들은 이런 절차를 거치지도 않은 대행스님을 깨달은 선사라고 표현하였다.

먼저 이평래교수의 노련한 논문 작성 기술은 대행스님의 정통성 결여에 대한 약점을 기가 막히게 보완한다. 장황한 <대승기신론>의 일심논리를 인용하여 대행스님을 대선사의 반열에 끌어 올리는가 하면 그 분의가르침을 법성종(法性宗)에 기반을 둔 정통선이라고 극찬한다. 그나마 이평래 교수는 대행스님의 행장(行狀)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나 보다. 이평래 교수로써는 대행스님의 가르침에 관한 부분은 얼마든지 자신의 논리로 합리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행스님의 행장만큼은 불교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고 보니 급기야 다른 근거를 제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평래 교수는 궁색하게도 불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우파니샤드시대의 ‘샤띠야까마 자발라’라는 수행자를 등장시켜 대행스님의 구도과정을 빛나게 만든다. 스승의 지도도 없이 혼자 떠돌며 제멋대로 수행한 대행스님의 구도 행각을 불교 안에서 찾지 못하고 외도의 구도기를 들어 포장한다.

하지만 이평래 교수의 이런 기술은 결과적으로 대행스님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자인(自認)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대행스님의 정통성 문제는 그날 세미나에서 함께 주제발표를 했던 김광식 교수의 논문에서도 확인되는 내용이다. 김광식 교수는 대행선의 문제점에 있어 정체성의 미흡과 계승의 불확실성(不確實性)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추측컨대 이와 같은 대행스님에 대한 정통성 결여에 대해서는 아마도 그날 세미나에 참여한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감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는 넓혀 말해서 대행스님의 핵심 사상인 주인공과 이를 둘러싼 갖가지 가르침들이 정통에 위배되고 있다는 점을 모두가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솔직히 표현해서 그날 학술대회에서 주제발표를 한 교수들 중에는 오래전부터 대행스님의 행장과 가르침에 의혹과 부정적 견해를 지닌 이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도 안다. 그러나 그들은 한마음선원의 의도대로 대행스님의 비 불교적 요소들은 손톱만큼도 건드리지 않은 채 치장과 합리화시키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간과할 수 없는 일은 대행스님 가르침의 핵심 자료라 할 수 있는 <한마음요전>이 대행스님의 구도기인 <도(道)>와 설법집인 <무(無)>에 근거해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세미나에서 발표한 발표문에는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도>와 <무>는 작가 김정빈에 의해 만들어진 귀중한 한마음선원의 설법포교자료이다. 오늘날 한마음선원이 이처럼 번성한 데에는 작가 김정빈을 빼놓고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한마음선원은 당시 한국 출판 역사상 최단기한에 백만 부를 판매한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김정빈을 만났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불사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진실이 이와 같은데도 주제 발표한 교수들과 한마음선원 측은 이를 삭제하고 논문을 작성하였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대행스님의 행장과 가르침 속에 깃든 비불교적 사건들을 은폐(隱蔽)하려는 시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평래 교수를 비롯한 기타 교수들의 발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들은 대행스님이 어디서 어떤 수행을 하다가 깨달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염불을 했는지, 화두를 참구 했는지, 관음기도를 했는지, 어떤 경전을 독송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냥 자유분방하게 수행해서 일심의 도리를 깨달았다고만 말할 뿐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떤 근거나 정황을 조금도 제시하지 못한다. 김광식 교수의 표현대로 객관성이 미흡하고 검증이 되지 않은 <한마음요전>에만 의지하여 대행스님을 대선사로 치켜세우기만 한다. <한마음요전>에 기록되어 있는 대행스님에 관한 수많은 일화 가운데에 비불교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못하고 그럴듯한 구절들만 선별하여 대행스님의 논리에 편승하였다.

이평래 교수는 대행스님이 어렸을 때부터 혜안이 열렸다고 극찬한다. 과연 그런가? 자연물들을 향해 ‘아빠’라고 부르면서 온종일 혼자 중얼중얼 지껄이는 행동이 혜안이 열린 것인가? 아니면 동네의 부잣집을 바라보며 ‘도깨비감투를 쓰고 저 집의 쌀을 훔쳐 실컷 밥을 해 먹겠다’고 상상한 행위가 혜안이 열린 것인가? 대행스님이 어려서 이미 사성제라도 깨닫고 십이연기라도 깨달았다는 말인가? 신격화(神格化)도 유분수지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대행스님을 치켜세운다. 또한 이평래 교수는 부처님을‘존재하지도 않은 실체에 관한 믿음을 거부한 분’으로 그 위대성을 표현하면서 대행스님이야말로 ‘연기(緣起)의 법칙을 따르는 분’으로 묘사한다. 참으로 당혹하기 짝이 없는 일로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대행스님이 연기법에 충실했다면 야훼의 목소리를 들은 모세도 연기법에 충실한 것이며 산신도사의 모습을 본 무당도 연기법에 충실한 것인가? 이평래 교수는 대행스님이 존재하지도 않는 환망공상의 ‘아빠’라는 실체에 이끌려 일생을 속아온 분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전혀 없는 것 같다. 대행스님의 아빠야말로 연기를 미혹해서 나온 무명업식(無明業識)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평래 교수는 논거로 삼고 있는 한마음 요전 내의 반불교적 요소는 싹 무시하고 주인(主人)이라는 문자와 공(空)이라는 문자에만 집착하여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대중들을 설득시키려 한다. 대행스님이 목이 말라 물을 먹으려 하는데 ‘물에 똥을싸고 다시 그 물을 먹으라’고 명령한 아빠가 어찌 진여불성이며, 아빠의 요구에 따라 서있는 기차의 바퀴 속에 들어가 밤새도록 죽음을 기다렸던 행위가 어찌 연기에 충실한 행위인지 도무지 황당한 주장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대행스님의 주인공을 바로 보라. 후에 주인공이라고 이름이 바뀐 정체불명의 아빠는 대행스님에게 있어 실체화된 신이었으며 절대자였고 지배자였다. 그 아빠는 대행스님의 청정한 원과 발심과 정진과 지혜에 의해 탄생된 것이 아닌 갈등과 비탄과 절망 속에서 탄생한 대망상의 결과물임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일심진여의 여래장 안에는 저런 식의 아빠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평래 교수야말로 대행스님이 쏟아 놓은 명자상(名字相)에 결박되어 있는 것이다. 진여불성에는 능견상(能見相)과 경계상(境界相)이 본래 없다는 이평래 교수 자신의 저서 내용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 대행 스님이 창건한 안양 한마음선원.
이평래 교수는 대행스님이 사용하고 있는 주인공의 다른 이름들, 아빠, 엄마, 심주, 청수, 하느님, 심봉, 나의님, 참나, 뿌리 등이 모두 진여일심(眞如一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이름은 모두 가명무실(假名無實)이기 때문에 주인공이 자신을 이끄는 참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묻는다. 부처님을 하느님아버지, 인드라, 야훼, 알라, 옥황상제, 천조대신 등으로 불러도 되는가? 또한 불성을 아트만, 푸드갈라, 지와로 불러도 되는가? 이평래 교수는 연기, 무아, 공, 무자성(無自性), 무주재자를 근본으로 하고 있는 부처님 말씀에 비추어 대행스님이 사용하는 모든 명칭은 모두 불교에 반하는 명칭인데도 정반대의 학설로 대행스님의 가르침을 비호한다. 미루어 보건대 혹 이평래 교수는 대행스님의 주인공에 앞서 <대승기신론>의 일심을 힌두의 브라만이나 푸드갈라로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평래 교수야말로 부처님의 무아설과는 동떨어진 유아론(有我論)이나 진아론에 빠진 학자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대행스님의 가르침을 무조건적으로 비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이평래 교수의 말처럼 일체의 명칭이 가명무실이라면 우리는 언어를 분별해 쓸 필요도 없고 진리와 부합한 용어를 구사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불교니 정법이니 하는 언설도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한다. 사람은 명칭(名稱)에 따라 대상을 이해하게 되어 있다. 명칭은 무실하지만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고 행위를 촉발시키므로 언어를 골라 사용해야 한다. 자세히 살펴보라. 대행스님의 주인공이야말로 불법에 위배되는 허구적 존재임과 동시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명칭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평래 교수의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모든 불교학자들을 모아 놓고 물어보라. 또한 정견을 지닌 수행자들을 향해 물어보라. 이평래 교수의 이 같은 견해에 동조할 수 있는지를, 참으로 이는 불교학의 오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행스님을 띄우는 일에 있어서는 차차석 교수, 박소령 교수, 김호귀 교수도 이평래 교수와 대동소이하다. 차차석 교수는 대행스님의 오공의식(五空意識)이 불교의 제반 사상과 통한다고 힘주어 주장한다. 반야사상, 유식사상, 천태사상, 화엄사상, 남종선사상 등 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대행스님의 오공의식에 들어있다고 말한다. 마치 백화점 진열대의 물건 늘어놓듯 장황한 논리를 펼쳐 대행스님을 마치 부처님 지위에 오른 듯 포장한다. 차차석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대행스님이야말로 제종(諸宗)의 종사(宗師)이다. 아마 한국 불교 역사 가운데에 어느 스님도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은 분은 대행스님 말고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차차석 교수는 대행스님의 오공의식을 설명하면서 불성은 무자성이고 공이라고 말하면서 오공의식은 이와 같은 불성에 기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대행 스님의 주인공이 과연 무자성이며 공의 원리를 지니고 있을까? 무자성이며 공한 성품을 지닌 주인공이 어떻게 대행스님을 이리가라 저리가라 명령하고 끌고 다니고 시험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대행스님의 이성과 판단력을 잠식시키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희한한 행동을 촉발케 했던 아빠라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어떻게 해서 무자성이며 공이 될 수 있는지 차차석 교수의 불교관에 새삼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신선한 밀가루인지 부패한 밀가루인지는 말하지 않고 빵맛만 선전하는 빵집의 광고 논리를 따르고 있다. 주인공의 정체를 깊이 파헤치지 않은 대행스님의 오공의식에 무슨 정당성이 있단 말인가? 대행스님이 한마음이라 했으니 대승기신론 사상이요, 오공이라 했으니 천태사상이며, 공이라 했으니 반야사상이요, 법계라는 했으니 화엄사상이며, 주인공이라 했으니 선종사상이라는 식의 논리로는 대행스님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김호귀 교수의 발표문은 밀가루를 가지고 여러 종류의 음식을 만들 듯 대행스님의 주인공에 화려한 장식을 달아준다. 역시 정체불명의 아빠와 그에 따른 비불교적 요소들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은 채 온갖 경서와 선어록 등을 동원하여 숙달된 논문 제작 실력으로 대행스님의 가르침에 금칠을 해준다. 주인공의 뿌리인 아빠의 정사(正邪) 여부는 거론도 안하고 아빠를 본래성불(本來成佛)과 연결시켜 대중들로 하여금 대행스님의 가르침이 새삼 위대한 가르침임을 자각케 한다. 그러나 안목이 제대로 갖추어진 사람이라면 이 같은 김호귀 교수의 발표 내용이 얼마나 객관적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는지 금방 알게 된다. 대행스님 가르침의 근거가 되는 아빠의 정체를 근원적으로 밝히지 않고 설명되어지는 모든 학설은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하다. 대행스님에게 지팡이를 짚고 늙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나와 결혼하자고 요구한 아빠가 본래성불자리인가? 본래성불이란 중생의 마음이 본래부터 청정하여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무슨 놈의 본래부처가 노인으로 나타나 ‘네가 죽어야 나를 보리라’하고 명령하는가? 김호귀 교수의 불교에 대한 안목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다음은 김광식 교수의 논문에 나타난 몇 가지 오도된 내용이다. 김광식 교수는 그래도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여 대행 스님을 다루려 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다만 대행스님의 행장을 다루는데 있어 <한마음요전>에만 의지 하다보니 몇 가지 잘못 기술된 내용이 보인다. 그 중에 하나가 대행스님과 방한암선사와의 관계이다. 사실 나는 대행스님이 출가하기 전 대행스님과 나눈 수많은 대화들 속에는 한암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확보하고 있는 대행스님의 전기에도 한암스님이라는 이름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 대행스님은 한암스님을 만난 적이 없으며 이 사실은 후에 <한마음요전>이 만들어지면서 어떤 과정을 통해 첨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김광식 교수가 지적한 이 부분을 비롯한 80년대 이전의 대행스님에 관한 행장은 물론 대행스님의 비불교적 요소들에 대해서 밝힐 예정이다. 다만 대행스님께 누가 될 수 있는 사적인 이야기들은 그 분에 대한 은혜와 인격을 위해서 거론하지 않을 것이다.

이어 김광식 교수의 발표문 중 대행스님이 기복불교를 거부했다는 내용에 대해서이다. 김광식 교수의 이와 같은 주장은 마치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잠이 들었다고 하는 말과 똑같다. 한마음 선원은 어느 불교 단체도 비할 수 없을 만큼 기복신앙이 발달된 곳이다. 대행스님의 행장을 살펴보면 순전히 병을 고친 이야기와 신통을 부린 이야기들이다. 전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한마음선원이 오늘날 이처럼 번성하게 된 일차 원인은 주인공을 기복의 원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한마음선원의 포교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듯 대행스님은 부처님이나 보살 대신 주인공을 신앙과 귀의의 대상으로 삼게 했다. 대행스님의 기복관은 불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기복이요, 주인공을 믿고 그에게 부탁하고 매달리면 바른 신앙이라고 여기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한마음 선원의 대중들은 자신의 모든 문제를 주인공에 맡기고 그곳에 소원을 빈다. <한마음요전>을 비롯한 여러 포교 자료에는 대행스님의 치병 행위, 영가천도, 소원성취 등에 관한 일화가 흘러넘치며 견성이나 성불의 원리보다는 주인공의 막강한 능력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김광식 교수는 이 부분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아마 김광식 교수의 의도라기보다는 대행스님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든다.

박소령 교수는 대행스님의 주인공이 대행스님의 설법을 빌어 실체가 아니라고 두둔한다. 대행스님의 주인공은 유무를 여읜 중도라는 것이다. 박소령 교수의 이 같은 설명이 언뜻 듣기에는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박소령 교수가 착각을 했든지 아니면 대행스님의 아빠가 비 정상적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곡을 시켰든지 둘 중 하나이다. 대행스님은 말로는 주인공이 실체가 없는 놈이라고는 설하지만 대행스님의 행장 가운데에 나타난 아빠의 성격은 분명 실체화되어 있다. 만약 박소령 교수 주장대로 대행스님의 주인공이 유무를 벗어난 중도이며 공이라면 대행스님이 어렸을 때부터 성장기까지 대행스님에게 말을 걸고 명령을 하고 끌고 다녔던 아빠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중도인가? 망념인가? 대행스님의 행장과 설법집을 보라. 비상식적인 이야기들과 영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대행스님이 병자를 고친 이야기, 국립묘지에서 귀신들과 대화 하는 이야기, 웬 할아버지가 나타나 결혼하자는 이야기, 허공을 나는 이야기, 축지법에 관한이야기 등 별별 희한한 내용들이 줄줄이 나온다. 그런데도 박소령 교수는 대행스님의 주인공에 실체가 없다고 대변하고 있으니 말이 되지 않는다. 박소령교수는 심령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대행스님의 행장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지 궁금하다. 이것도 다 주인공의 나툼이라고 답할 것인가? 답변을 듣고 싶다.

지금까지 나는 대행선 학술대회에서 이평래 교수를 비롯한 그 밖의 교수들이 발표한 논문의 내용들이 무슨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지적하였다. 말한 바와 같이 이평래 교수와 이에 동참한 모든 교수들은 대행스님의 비불교적 요소들은 한마디도 거론하지 않고 대행스님의 위대성만을 강조하는 내용들로 꽉 채우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법(正法)은 정법이고 사법(邪法)은 사법이다. 사법은 금칠을 한다고 해서 정법이 될 수 없다. 나는 대행스님으로부터 “그대는 나의 입과 같다”는 말씀을 들을 정도로 대행스님으로부터 신뢰를 받았었다. 또한 나는 한마음선원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대행스님의 가르침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행스님과 대행스님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향하여 이러한 비판을 하는 이유는 작게는 한마음선원의 미래를 위하고 크게는 한국불교를 위해서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의 이러한 행위가 오히려 대행스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대행스님은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며 존경받을 만한 분이다. 그러나 단호히 말하건대 대행스님의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한마음선원은 이를 인정하고 과감히 대행스님의 가르침을 재정비하여 새로운 종지와 가르침을 가지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대행스님의 행장에 나타난 아빠와 그 아빠의 변형인 주인공을 시급히 척결하여 정법에 기초한 종지를 재탄생시켜야한다. 이것이 진정 대행스님을 위하고 한마음선원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길임을 자각해야 한다. 아무리 대학자들을 등장시켜 대행스님 몸통에 부처님의 옷을 입힌다 해도 그 실상은 숨길수가 없는 것이다. 대행선연구원에 동참한 학자들 역시 그동안 쌓아 놓은 연구업적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기를 바란다. 좀 더 객관적 시각과 양심을 지니고 한마음선원의 미래를 염려하여 대행스님의 가르침에 대해 접근해 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1394호 / 2017년 6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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