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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제주도 성지순례 ② 산방산 하멜 상선 전시관-보문사-산방굴사

기사승인 2017.06.05  14: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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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의 선사 위로 속에 사경삼매 든 추사를 기억하다

   
▲ 초의와 추사의 정이 배어 있는 산방산. 산기슭에는 보문사(사진 오른쪽), 산방사(사진 왼쪽), 광명사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제주 불교의 중흥을 주도하고 있는 대표 사찰들이다.

한라산 불래오름의 존자암에서 남서쪽 70리 남짓의 서귀포 안덕면에 산방산이 있다. 주홍빛 귤 무성히 달린 길가의 귤나무 감상 하다가 엎어놓은 종(鐘) 모양의 우뚝 솟은 산(395m)을 서귀포 어딘가에서 보았다면 산방산과 마주한 것이다. 움푹 파인 한라산 정상을 본 제주도 사람들은 백록담에 저 산방산 얹으면 딱 맞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럴만한 연유가 있다.

6개월 곁에 있던 초의
‘반야심경’ 사경 권해
분노·아만 녹인 추사
명작 ‘세한도’ 남겨


옛날 한 사냥꾼이 사슴을 잡으려 한라산 정상에 올라섰는데 그만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엉덩이를 건드리고 말았다. 느닷없는 접촉에 격분한 옥황상제는 애꿎은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냅다 던져 버렸다. 하늘나라 관장하는 상제(上帝)로서 일개 사냥꾼을 혼낸다는 게 격에 맞지 않고, 그렇다 해서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내버려 둘 수만은 없었으니 산봉우리라도 던져야 했을 터다.

   
▲ 유채꽃과 청보리 품은 산방산의 봄.

산방산에서 떨어져 나온 암봉이 저 산방산이라는 건데, 호기심 많은 지질학자들이 그 전설에 접근했다. 암석 연대 측정 결과 한라산 백록담은 약 2만 살, 산방산은 75만 살로 확인됐다. 산방산이 백록담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참고로 제주도는 200만 살이고 성산 일출봉은 겨우 5000살이다.

산방산 오르는 길은 다양하지만 ‘하멜 상선 전시관’을 기점으로 오르는 게 가장 좋다. 유채꽃과 청보리 품은 산방산을 넉넉하게 감상할 수 있고, 형제섬을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는 용머리 해안을 파도소리 따라 거닐다가 산행(산책에 가까움)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 하멜 기념비와 하멜 상선 전시관.

1653년 대만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핸드릭 하멜(Hendrik Hamel)과 일행 36명이 제주도 앞바다에 표류했다. ‘하멜표류기’에 등장하는 케파트(Quepart)라는 지명이 지금의 ‘가파도’와 연관 있을 것으로 보고 표류지를 가파도로 확정하고 있다. 산방산과 마주한 가파도는 바람이 유독 세고 많아 옛부터 표류와 난파가 잦았던 곳이어서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이월 바람살에 가파도 검은 암소뿔이 오그라진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하멜이 도착한 곳은 어디일까? 표착지에 대해서는 중문해안, 강정해안, 수월봉 인근 등 다양한 견해가 있었는데, 1980년 10월 국제문화협회와 네덜란드 왕국 문화역사재단이 ‘하멜 표류기’를 근거로 산방산 앞 해안가를 표착지로 정했다. 이에 따라 산방산과 용머리 해안으로 갈리는 길목에 ‘하멜 상선 기념관’이, 산방산 오르는 초입에 ‘하멜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2000년대 접어들며 ‘지영록(知瀛錄)’이 발견되면서 차귀도에서 가까운 수월봉 남동쪽 영일해안 인근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돼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제주 목사를 지낸 이익태는 ‘지영록’을 통해 하멜 상선의 난파지를 ‘차귀진하 대하수연변(遮歸鎭下 大也水沿邊)’이라고 기록했다. 하멜이 표류한 때는 1653년. 그는 14년 동안 조선에 억류됐다가 귀국해 ‘하멜 표류기’를 써 1668년 출판했다. ‘지영록’은 이익태가 제주 목사를 지내던 1694년부터 1696년 사이에 지어졌다. 간과할 수 없는 문헌임에는 틀림 없다. 수월봉(水月峰) 서 있는 영일해안은 산방산으로부터 서북쪽 50리 떨어져 있다. 파도에 휩쓸렸던 하멜상선은 어디에 닿았던 것일까?

   
▲ 산방산 용머리 해안. 용 한 마리가 형제섬을 향해 날아가려는 듯 꿈틀거리고 있다.

하멜 표류 187년 후인 1840년 9월 산방산 인근에 조선 천재의 발길이 닿았다. 표류가 아닌 귀양이었다. 55세의 추사 김정희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돼 제주목 대정현에 유배됐다. 서귀포시 대정읍에 추사기념관과 함께 유배지가 복원돼 있다.

유배 2년을 넘긴 직후인 1842년 12월15일 추사에게 아내 예안 이씨가 11월13일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전해진다. 한 달이 지나서야 부음을 접한 추사는 통곡으로 점철된 ‘부인 예안 이씨 애서문(夫人禮安李氏哀逝文)’을 지어 본가에 부친다.

‘오래 전에 내가 만약 부인이 죽는다면 내가 먼저 죽는 것이 도리에 맞다 했는데, 부인은 크게 놀라 곧장 귀를 막고 멀리 물러서서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끝내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대 먼저 죽는 게 무엇이 유쾌하고 만족스러워 나로 하여금 두 눈 뜨고 홀아비로 살게 한단 말이오. 푸른 바다같이, 먼 하늘처럼 나의 한(恨)은 다함이 없습니다.’

부인 잃은 추사의 시린 아픔은 시 ‘배소만처상(配所輓妻喪. 유배에서 처의 상을 애도하다)’에서도 느껴진다.

‘아아, 어떻게 월하노인께 하소연 하여/ 다음 생에서 내가 아내가 되고 그대 남편 되어/ 나 죽고 그대 천리 밖에 살아서/ 비통한 이 마음 알게 하리요.’

   
▲ 산방산에서 5km 거리의 대정읍 추사유배지에 ‘추사관’이 있다.

부인의 49재를 홀로 보냈어야만 했을 추사 곁에 도반 초의 선사가 찾아온다. 대흥사에서 강진포구까지가 60리고, 강진서 가장 가까운 항구(지금의 제주 공항 인근)로 온다 해도 350리 뱃길이다. 또한 다시 길을 걸어 대정까지 오는 길이 100리. 살 에는 삭풍을 뚫고 500리 넘는 길을 달려온 초의를 보고 흘렸을 추사의 눈물이 그려진다. 초의는 지금의 산방굴사에 머무르며 반 년 동안 추사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산방굴사(山房窟寺)는 산방산 서남쪽 해발고도 200m 지점에 길이 10m, 높이 5m, 너비 5m의 천연석굴이다. 고려시대 혜일(慧日) 스님이 자신을 ‘산방법승(山房法僧)’이라 하고는 이곳에서 정진하다 입적했다. 굴 내부는 석벽처럼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암벽 천장에서 맑은 물방울이 떨어지는데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 언제가부터 산방굴에 부처님이 봉안되며 산방굴사로 불리고 있다. 산기슭에는 보문사와 산방사, 광명사 등 세 절이 나란히 앉아 있다. 3개 사찰 중 어느 절도 산방굴사를 관리하고 있지 않다. 산방굴사는 마을이 공동으로 관리 보전하고 있다.

   
▲ 초의 선사가 머물렀던 산방굴사.

1978년 발행된 ‘남제주 군지’에는 ‘조선조 말엽 현종 때 초의가 이 절(산방굴사)에서 수도했다’는 사실과 ‘유배 중 추사에게 청하여 ‘밀다경(반야심경)’을 써 널리 전하였다’는 구전이 담겨 있다.

안덕면 사계리의 산방굴에서 추사 유배지 대정까지는 10리가 조금 넘는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니 두 벗은 자주 만날 터였다. 원통과 비애로 가득했던 추사의 마음 수행을 위해 초의가 ‘반야심경’ 사경을 권유했던 것일까? 아니며 먼 길 나서 추사 자신을 만나러 와 준 벗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 ‘반야심경’ 사경을 자청했던 것일까?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초의의 권유와 추사의 감사 마음이 어우러져 시작된 사경일 터다.

   
▲ 산방굴사에서 바라본 풍광은 ‘성산일출’과 함께 ‘제주 영주십경(瀛州十景)’ 중 하나로 꼽힌다.

조선 왕실을 향한 분노, 천재들에게서 곧잘 보이는 아만의 업들이 사경삼매 속에서 화롯불에 눈 녹듯 사라졌던 것일까? 8년 3개월의 제주 유배에서 추사는 자신만의 서체를 완성했고, 명작 ‘세한도’를 남겼다. 추사가 남긴 ‘반야심경’은 다양하지만 ‘초의 정송 반야심경’은 제주 유배 중 제작된 것이기에 의미 있다. 고서점 둘러보다 ‘초의 정송 반야심경’을 보았다면 손에 쥐고 볼 일이다.

산방굴사를 뒤로 하고 산방산이 품은 마을과 바다를 안아 본다. 제주 10경다운 절경이다. 형제섬을 향해 용 한 마리 꿈틀거린다. 저 용은 송악산 너머의 가파도와 마라도로 날아오르는가 보다. 아픔 있는 사람도 이 광경 바라보며 정채봉의 ‘바다가 주는 말’을 들으면 그 아픔 조금은 아물 수 있을 터다.

‘인간사 섬바위 같은 거야/ 빗금 없는 섬바위가 어디에 있겠니/ 우두커니 서서/ 아린 상처가 덧나지 않게/ 소금물에 씻으며 살 수밖에…’ 

추사와 초의가 마주했던 태평양은 오늘도 푸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산방산 랜드 주차장. 산방산랜드를 지나 500m 걸으면 하멜상선 전시관이다. 오른쪽 길은 용머리해안 가는 길이고, 왼쪽 데크로는 하멜기념비로 이어진다. 용머리해안을 한바퀴 돌면 자연스레 데크로와 만난다. 보문사와 산방사를 참배한 후 10분 남짓 오르면 산방굴사다. 산방산 삼거리로 나와 원점회귀 코스를 택하면 마을 정취도 느껴볼 수 있다.

 

이것만은 꼭!

   
 
보문사·산방사 참배: 조선의 억불정책과 제주 4·3사건 등 제주 불교가 피폐지경에 이르렀지만 두 사찰은 꿋꿋하게 산방산을 지켜왔다. 산방굴사로 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 지자체가 관리하고 있기에 두 사찰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산방굴사 역시 두 사찰과 관련 없다. 보문·산방사 옆에 서경보 스님과 인연 깊은 광명사도 자리하고 있다.

 



[1394호 / 2017년 6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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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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