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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감정을 내려놓고 오직 할 뿐

기자명 조정육

이미 일어난 일, 화낼 이유 어디 있을까?

▲ 이형우, ‘그래! 다시 당당하게 서 보는 거야!’, 72.7×60.6cm, 천 위에 아크릴, 2013 : 닭 울음소리는 첫 새벽을 알리는 신호다. 새벽은 희망의 시작이며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다. 도전은 만만치 않은 일을 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어떤 일을 할 때 순조롭게 풀리는 경우는 드물다. 사소한 문제가 생기거나 커다란 장벽에 부딪쳐 주저앉고 싶을 때가 더 많다. 그럴 때 한 걸음 물러나 문제를 바라보면 해답이 보일 수가 있다.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오직 그 일에만 집중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무슨 김밥을 이렇게 크게 싸?”

김밥 싸는 모습을 본 남편이 묻는다. 넓은 김에 찰밥을 얼마나 많이 넣었던지 김밥이 무만 했다.

“혹시 남으면 저녁에 먹으려고.”

강의 하러 창원으로 가야하는데
기차 놓쳐서 지각만 걱정하다가
지각에 대해 수긍하며 받아들여
도착 위해 최선 다하는 마음가져

오늘은 창원에서 특강을 하는 날이다. 오후 2시에 특강이 예정되어 있는데 1시에 마산역에 도착하면 곧바로 강의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점심 먹을 시간이 애매하다. 보통 때 같으면 빵이나 샌드위치로 때울 수도 있지만 약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밥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 점심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 남편이 삶은 계란을 가져가라고 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 계란을 삶았다. 혹시 터질지 몰라 여섯 개를 삶았다. 그런데 희한하게 여섯 개가 모두 하나도 터지지 않고 곱게 삶아졌다. 속이 익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하나를 먹고 나머지 다섯 개를 담았다. 조금 많다 싶었지만 그냥 다 넣었다. 계란을 삶은 후 아침밥을 차렸다. 남편 그릇에 찰밥을 담다가 보름 때면 김에 찰밥을 싸서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것을 싸 가면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김을 펼치고 찰밥을 수북이 퍼 담은 모습을 본 남편이 의아해서 한 말이었다. 나는 무처럼 커진 김밥을 은박지로 감싸서 가방에 넣고 조그만 반찬통에 김치도 담았다. 지방 강의를 자주 다니지만 이렇게 밥을 준비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미래를 예견한다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확인하게 되었다.

아침밥을 먹은 후 남편차를 타고 수서역으로 향한다. 기차표는 이미 예매를 했기 때문에 느긋한 마음으로 나선다. 집에서 수서역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아 아무리 막혀도 30분이면 충분하다. 토요일에는 출근차량이 적어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다.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한 시간 전에 출발한다. 집을 나와 10분쯤 달렸을까. 이상하게 앞차들이 느리게 간다. 2차선에 있는 차들이야 그렇다 쳐도 1차선에서 달리는 차들까지 좀처럼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는 곳마다 신호등에 걸린다. 느낌이 좋지 않다. 아직 시간도 넉넉한데 괜한 걱정을 하는 걸까.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수서역에 거의 다 와서 차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고개를 내밀어 앞쪽을 바라보니 50미터쯤 앞에 차 두 대가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마음은 타들어 가는데 거의 이십 분을 꼼짝없이 도로에 갇혀 있게 되었다. 눈앞에 수서역이 보이는데도 뛰어갈 수도 없다. 도로가 정리되고 차가 달릴 수 있게 된 것은 기차 출발 십오 분 전이었다. 열차 출발시간이 열 시라는 사실을 남편은 모르고 있는 것일까. 수서역 부근 도로에서 유턴을 하려면 거의 이백여 미터를 가야 하는데 남편은 중간에서 불법 유턴도 하지 않고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 십 분 남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마구 달리면 아슬아슬하게 열차는 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뭐에 씌운 것일까. 유턴을 한 남편이 수서역 쪽으로 빠지는 길을 그냥 지나치고 직진을 한다. 왜 이리 가냐고 물었더니 잠깐 딴 생각을 했단다. 머나먼 길을 두 번 유턴을 해서 수서역에 도착했을 때는 열 시에서 오 분이 지나 있었다. 결국 기차를 놓쳤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우선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했다. 수서에서 창원까지의 거리를 내비게이션에 찍어 보니 4시간50분이 걸린다고 나온다. 지금 출발해도 3시에 도착한다. 게다가 지금은 토요일 오전이다. 고속도로 하행선이 막힐 것은 뻔하다. 3시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강의 들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한 시간을 기다려 달라고 할 수 있을까. 도착할 때쯤이면 사람들은 다 가고 없을 텐데 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곧바로 출발했다. 설령 강의를 하지 못하더라도 약속을 했으니 일단 가야 한다. 가서 남은 사람들에게 사과만 하고 오더라도 가야 한다. 시내 구간을 빠져나와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역시 막힌다. 중부내륙고속도로에 들어서기까지 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도착 예정시간은 점점 더 길어진다. 도서관 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낸다. 사정을 얘기하고 3시쯤 강의를 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 곧바로 전화가 왔다. 이미 공지 된 사항이라 한 시간을 늦출 수는 없고 30분 정도는 어떻게 해보겠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남편에게 주문을 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벌칙금을 내더라도 빨리 가자고 했다. 중간에 휴게소 화장실에 들른 것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달렸다. 얼마나 빨리 달렸던지 약속 시간보다 10분 늦은 2시40분 도서관에 도착했다. 9시에 집에서 나왔으니 5시간40분을 달려온 셈이다.

그 시간 동안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살다보면 불가항력적인 일이 발생한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일들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내 탓도 아닌데 일의 결과는 고스란히 내가 책임져야 한다. 불합리하고 억울하다. 이런 황당한 경우를 당할 때 나는 두 가지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 누군가를 향해 마구 화를 내거나 이미 발생한 일을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 중의 하나다. 다행히 나는 두 번째 태도를 선택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을 당해 화를 내거나 조바심을 친다 하여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령 도서관에 늦게 도착해서 욕을 먹더라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 때문에 발생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미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도 개입시키지 말고 그냥 하면 된다. 오직 할 뿐이다. 다음부터 수서역에 갈 때는 지하철을 이용해야겠다. 상황을 받아들이자 마음이 편안하다. 그러고 나자 김밥과 계란이 생각났다. 어떻게 이런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 점심을 준비했을까. 살다 보면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신기할 뿐이다.

강의 장소에 들어가 보니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다지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기다리고 있다. 감동이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께 감사하다는 인사말로 강의를 시작한다. 오늘 강의는 내 생에 결코 잊을 수 없는 명강의가 될 것이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394호 / 2017년 6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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