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행선, 실질적 수행 메커니즘서 고찰해야 이해 가능”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7.06.14 19:12
  • 수정 2017.06.14 19:27
  • 댓글 28

이상호 전 한마음선원 청년연합회장, 이제열 불교경전원장 반박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이 최근 한마음선원 대행선연구원의 ‘대행선’ 학술대회의 논문 내용을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서강대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상호 전 한마음선원 전국청년연합회장이 6월14일 법보신문에 이제열 원장의 주장을 비판하는 기고문을 보내왔다. 이 전 회장은 ‘대행선 학술대회의 내용을 비판한다를 읽고’라는 기고를 통해 “주인공은 대행선 수증론의 맥락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비탄과 절망 속에서 나눔의 원력을 실천하는 방편”이라고 강조했다. 편집자

■기고 전문- ‘대행선 학술대회의 내용을 비판한다’를 읽고

필자는 대행선연구회는 물론이고 이번 학술회와는 전혀 관계없지만, 80년대 말 한마음선원 부산지원과 인연을 맺은 후, 한동안 청년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초대 전국청년연합회장까지 역임한 적이 있다. 이번에 이제열 원장의 ‘대행선 학술대회의 내용을 비판한다’를 읽고서, 지난날 대행(大行, 1927~2012) 스님을 알았던 인연과 현재 선불교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몇 가지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이제열 원장은 한마음선원의 미래와 한국불교를 위한 마음으로, 이번 학술회에 참여한 학자들이 대행선에 들어있는 비불교적 요소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거나 외면할 뿐만 아니라, 합리화에만 급급하다는 취지로 극렬히 비판한다. 그가 논문들에 대하여 지적한 점은 필자가 대답할 입장은 아니지만, 대행선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그 정체성을 왜곡시키는 부분은 어떤 방식으로든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또한, 그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자체가 현재 한국선불교의 풍토에 내포되어 있는 문제점들을 드러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변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자 한다.

이 원장이 쓴 장문의 글은 전체적으로 비판적인 어조로 가득하지만, 그 핵심은 대체로 주인공과 그 수증론에 관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주인공은 어릴 적 갈등과 비탄과 절망 속에서 탄생한 대망상의 결과물로서 환망공상의 실체로 만들어진 ‘아빠’가 변형된 것이며, 진여불성이 아니고 무자성의 공도 아니며, 오로지 실체화된 신이고, 절대자이며, 지배자라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막강한 능력에 초점을 맞추어 기복의 원리로 사용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그리고 대행스님의 깨달음은 스승에게 점검받으면서 인가받은 것이 아니므로 대행스님을 선사라 할 수 없고, 그 수행방법도 염불인지 화두인지, 관음기도인지, 독경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외 대행 스님이 한암(漢巖,1876~1951) 스님을 만난 적이 없다는 것과 ‘한마음요전’의 객관성이 미흡하고 검증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대행 스님의 행장에 나타난 아빠와 그 아빠의 변형인 주인공을 시급히 척결하여 정법에 기초한 종지를 재탄생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치병이나 기복 등의 이유로 주인공을 실체화시킴으로써 비불교적이 되었다는 그의 비판은 단순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대행 스님이 제시하는 수증론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사실 개념을 중심으로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영역에서 연구하는 학자나 이론가의 입장에서 매우 심리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는 수행체험 영역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학문적 언어는 일정한 논리적 흐름을 벗어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수행언어는 단순히 개념적인 논리성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고, 그 참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수행의 메커니즘 속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대행스님은 ‘중생으로서 나’가 ‘참나로서 주인공’을 믿고, 맡기고, 지켜봄을 통해, 주인공을 알고 서로 둘이 아니게 계합하되, 필경에는 공(空)마저 버려서 주인공의 나툼을 이루는 경지까지, 세 번의 죽음으로 그 수행법을 설정하였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시키는 대로 이리 가고, 저리 간다는 말은 주인공으로 완전히 나투기 전에 자기와 자기의 대화를 통해 길을 모색(대행선에서는 실험)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만, 그 바탕인 주인공을 이미 알고 계합하였기 때문에 부리는 자나 부림을 당하는 자는 둘이 아니다. 만약 계합하지 않았다면 먼저 주인공을 철저히 믿음으로써 계합에 준할 정도로 ‘중생으로서 나’를 온전히 내려놓아야 한다.

이런 수증론에 치병과 기복도 응용하는데, 그 근본이치는 결국 주인공을 알고 계합하기 위함이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였다. 치병·기복이라 해도 그 속에는 고통당하는 중생의 아픔이 있고, 구원의 원력을 세운 보살이나 부처의 자비와 가피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다.

대행 스님이 좋아했다고 하는 ‘육조단경’에서도 ‘모든 법이 자성에 있다(世人性本自淨 萬法在自性)’고 하였으니, 치병·기복이 그 속에 있지 않다면 그 법은 불완전한 법이라는 말 밖에 되지 않으므로, 이는 원만 구족한 불법의 세계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만, 스스로 주인공을 자기와 별도로 구분되는 절대자로 여기거나 또는 치병·기복을 빌미로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간의 거래 대상으로 여긴다면 삿된 길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 이 원장은 대행 스님이 특별한 수행법이 없었고, 스승의 점검이나 깨달음에 대한 인가가 없었으니 선사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대행 스님이 외형적으로는 사제지간(師弟之間)의 지속적인 점검 과정을 거치는 전형적인 간화선 수행과는 다를 수 있지만, 내면적인 측면에서는 화두수행의 메커니즘을 따라왔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선종의 전통적인 수행관에 비추어볼 때, 달마 이후 육조 혜능(六祖 慧能, 638~713)을 비롯한 조사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수지수(無修之修) 또는 도불용수(道不用修)라 하여 ‘도에는 인위적인 수행이 필요치 않다’는 조류가 있었고, 당대 이후 송대에서 발생한 문자선등으로 폐해가 생겨서 시대적 필요에 따라 간화선이 만들어진 것을 감안할 때, 깨달음은 반드시 간화선 수행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독단론은 있을 수 없다.

더욱이 혜능에 따르면,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면 스스로 불도를 이룬다(識心見性 自成佛道)’고 하였으니 깨달음은 스스로 증명(自證)하는 것이 근본 이치다. 또한 ‘만약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스승을 찾아서 견성하라(若不能自悟者 須覓大善知識示道 見性)’고 하였으니, 자증(自證)이 우선이지만 그것이 어려워 스승을 찾는 것이 선종의 전통적인 입장임에도 현재 조계종이 표방하는 수행풍토에 맞지 않다고 해서 그 깨달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현재 조계종의 간화선 수행법에서 지속적인 스승의 점검과 인가 과정이 대중들에게 보편화되어 있는지 그 문제부터 짚어보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대행 스님 주인공 나투도록 인도
생활‧수행 이어가는 수행법 지도
한마음선원 세력 확장 배경에는
대행 스님의 나눔원력 실천 때문

치병‧기복 중생구제 원력서 비롯
깨달음은 스스로 증명하는 것
조계종 수행풍토에 안 맞는다고
깨달음 인정 않는 것은 부적절

그 외 사실적인 관계에서 대행스님은 한암 스님에 대하여 한 번도 말한 적이 없고, 그를 본 적도 없다고 비판하지만, 대행 스님은 평소 설법 중에 탄허(呑虛,1913~1983) 스님과 사형사제하며 돈독한 관계였음을 자주 언급한 바 있는데, 그 스승인 한암 스님을 모른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이 원장의 주관적인 판단보다는 그가 밝힌 대로 심도 있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란다.

또한, ‘한마음요전’의 객관성과 검증의 문제는 왜 필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객관화시키고 검증해야 하는지 이 원장의 보완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아마도 ‘한마음요전’의 내용이 기존의 불교교리에 근거해서 적합한 내용인지 여부를 검증하라는 뜻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기존의 선사들이 각자 자기의 종풍을 드날린 선종의 역사성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무문관(無門關)’에서도 ‘큰 도는 문이 없어 (오히려) 천 가지나 차이나는 길이 있다(大道無門 千差有路)’고 하였으니, 굳이 틀을 씌우고자 함은 대행선을 선종으로 인정하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

특히, 현재 한국의 4대 불교 종파에 속하는 천태종, 진각종, 원불교 등에서 그 창종자들의 행장을 살펴보면, 먼저 깨달음이 있었고, 조직의 형성에 따라 그 깨달음에 맞는 교리들을 체계화시키면서 정체성을 정립시켜 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마음선원이 새로운 종파의 창종을 선택하기 보다는 기존의 조계종에서 뿌리내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점은 대행스님이 상원사를 중심으로 한국 선불교의 정통성과 맥이 닿아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이 원장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그 자체로서 한국선불교의 풍토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는 점을 세 가지 측면에서 밝히고자 한다.

첫째, 선종의 종교학적 관점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다. 선종에서는 전통적으로 선사의 수행과정에 대하여 언어문자로 자세히 전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이런 전통이 필요한 점도 있지만, 현대는 모든 분야에서 다양한 정보를 서로 연관시켜 융·복합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선을 비롯한 명상수행도 마찬가지로 여러 종파와 다양한 형태의 명상들이 일반에 퍼져있는데, 이들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깊은 학문적 연구가 요구되는 실정이다. 그러나 선종에서 계속 전통에만 사로잡혀 수행과정 등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등한시 한다면 앞으로도 선 수행에 대한 학문적 연구, 특히 종교학적 연구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대행 스님의 경우, 그의 행장과 수행시스템은 비단 ‘한마음요전’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개체로 전해지기 때문에 선학을 비롯한 종교학 분야에서도 연구하기 좋은 자료가 풍부하다. 예를 들면, 이 원장이 비판한 ‘아빠’의 개념은 단순히 환망공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종교적 경험이기 때문에 종교심리학의 중간대상이론으로 연구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종교학적 연구는 선 수행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생수불이(生修不二)의 수행풍토다. 생수불이는 생활과 수행이 둘이 아니라는 말인데, 흔히 간화선을 생활선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한국의 간화선은 대중들이 가장 어렵게 여기는 수행법이고, 승가를 중심으로 상근기의 사람들만이 수행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어서 일상생활에 적용시킨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대행 스님의 수행법은 늘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일상생활을 소재로 쉽게 설명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특징이 있다. 이 생수불이는 일상에서 지속적인 점검을 필요로 한다. 자칫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또는 자기 독단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행 스님은 생전에 적어도 매주 한번은 법석을 열어 누구든지 찾아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응대하며,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때 대중들은 일상생활에 관련되는 문제들도 상담하였는데, 치병과 기복의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대행스님의 결론은 주인공을 믿고, 맡기고, 지켜봄을 통해 주인공이 드러남을 알게 하고, 나툴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그로 인해 대중들은 자연스럽게 생활과 수행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이어가는 수행법을 접할 수 있었다.

셋째, 나눔의 실천이다. 한국 선불교의 풍토는 우선 깨달음에 치중하고 대중교화는 뒷전이다시피 하는데 그에 따라 나눔의 실천이 약해 보인다. 그러나 대행스님은 어릴 적부터 ‘갈등과 비탄과 절망 속에서’ 자기의 고통을 거울삼아 타인에게 나눔에 대하여 먼저 눈을 뜨고 평생 원력으로 삼았다. 한마음선원이 대중적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원장이 지적한 것처럼 비불교적 요소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먼저 돌아보고 나눔의 원력을 실천하였기 때문에 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이다.

이상에서 이제열 원장의 대행선 관련 학술회에 대한 문제제기를 바탕으로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였다. 다만 그의 비판은 그간 대행 스님과 한마음선원에 대하여 의혹의 눈길을 보내던 사람들의 우려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비록 선리(禪理)적으로 대행선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대중들의 우려를 존중하여 그런

▲ 이상호 전 한마음선원 전국청년연합회장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수용할 것은 과감히 수용하고 반성할 것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이론과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유동적인 완충지대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너무나 가까워 구분이 안 될 때도 있지만, 한 꺼풀 벗기고 보면 또 다시 너무 멀어져 도저히 좁혀지지 않을 때도 있다. 선가에서는 이런 점을 간파하여 불립문자 직지인심(不立文字 直指人心)을 내세웠으니 그 혜안은 길이 따라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앞으로 한마음선원에서 매년 대행선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결과를 학술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라고 이미 밝혔으니, 보다 체계적인 연구로 대행선의 정체성이 학문적으로 정착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를 통해 한마음선원과 한국선불교의 발전에 이바지 할 것을 기대한다.

[1396호 / 2017년 6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