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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구지 선사의 손가락-상

한 손가락 드는 순간 다른 세계가 열린다

▲ ‘일화개 세계기(一花開 世界起)’고윤숙 화가

구지(俱胝)는 손가락 하나로 남은 선사다. 어느 암자에 머물고 있을 때 실제(實際)라는 비구니가 들어와 삿갓도 벗지 않고 선상(禪床)을 돌며 “말할 수 있으면 벗겠소”를 반복했지만 말 한 마디 하지 못한다. 이에 분심이 일어 선지식을 참방하며 행각하겠다 결심하지만 꿈에 산신(山神)이 나타나 그럴 것 없다며 떠나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다음날 천룡(天龍)이 암자를 찾아오자 그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하며 가르침을 청한다. 그러자 천룡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여주고, 이를 본 구지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후 누가 묻기만 하면 손가락을 하나 세워 보일 뿐이었다.

사실 이보다 더 인상적인 얘기는 그 암자에 같이 있던 동자승 얘기다. 누가 무얼 물어도 손가락 하나 세워 보여주는 걸 본 동자는, 구지가 잠시 나간 사이 찾아온 학인이 “스님께서는 평소에 어떤 법으로 가르치시던가?” 묻자 구지와 똑같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여주었다. 그리곤 그 얘기를 돌아온 구지에게 말했다. 그러자 구지는 칼을 몰래 가져와선, 동자에게 다시 불법을 묻는다. 동자는 매번 보던 대로 손가락을 하나 세워 보여준다. 그러자 구지는 그 손가락을 얼른 붙잡아 칼로 잘라버렸고 동자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구지가 소리를 질러 동자를 부르니 동자는 머리를 돌렸다. 바로 그때 구지가 손가락을 하나 세우니 동자가 훤히 깨치게 되었다고 한다.

구지 선사, 불법 청할 때마다 손가락 들어
특이 행동 하나에 과거와 다른 세상 열려
기독교의 ‘사과’ 딴 후 달라진 세상과 같아

설마 사실일까 싶다. 그렇게 깨쳤다는 동자승의 법명이 따로 전하지 않는 걸 보면, 가르침을 펴기 위해 만들어진 얘기일 것 같다. 허나 모를 일이다. 선사들이란 깨우침을 얻는데 목숨 건 분들이고, 이조(二祖) 혜가(慧可)처럼 팔을 잘라 가르침을 청한 전례가 있으니. 그래도 자기 손가락이라면 모를까 남의 손가락 자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철모르는 어린 동자승의 손가락을 자른다는 건 더더군다나 쉽지 않을 일일 것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스승의 행동을 따라 하며 ‘사구’로 만들어버린 것을 완전히 뒤집어 깨우침을 주는 활구로 만드는 과감한 발상이 놀랍다.

그런데 왜 구지는 가르침을 청하고 불법을 묻는 이들에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여주었을까? ‘장자’에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고 만물은 한 마리 말”이라는 말이 나오지만(‘장자 1’ , 전통문화연구회, 86), 이와는 맥락이 많이 다르다. 하지만 이와 비슷하게 주먹을 들어 세우는 얘기는 선가의 공안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주장자를 세우는 얘기도 그렇다. 손가락이나 주먹이나 세우는 것을 굳이 해석하자면, ‘본래면목’이나 ‘체’라고 하는 것을 가시화하려는 것이라고들 하겠지만, 내가 구지의 세운 손가락에서 본 것은 그 손가락 따라 일어나는 하나의 세계다. ‘마음’이라 하든 ‘생각’이라 하든, 내가 손가락 하나 세우는 것은 어떤 하나의 세계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여 원오는 ‘구지의 한 손가락’을 다룬 ‘벽암록’ 19칙 수시(垂示)의 첫 문장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한 티끌이 일어나니 온 대지가 그 속에 들어가고, 꽃 한 송이 피어나니 그 속에 세계가 열린다.”

손가락 하나를 세워 세계를 만들어낸다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기독교의 신화를 생각하며 흔히들 말하듯 세계를 만들어내는 게 ‘신’이라고 한다면, 손가락을 세우며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이는 모두 신이라 할 것이다. 손가락을 세울 때마다 우리는 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 세우는 손가락은 세상의 ‘본체’를 상징하는 기호가 된 것일까? 그런데 손가락 하나 세우는 것으로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진다니, 허황된 말이거나 해도 너무한 과장 아닌가? 마음에 한 물결이 일어나니 만 물결이 따라 일어난다는 자주 듣는 말처럼, 작은 일 하나에 온통 사로잡혀 그게 모든 것인 양 빠져 들어가는 우리네 마음의 번뇌를 뜻하는 비유라고 해야 할까? 그때 세계란 티끌 하나에 의해 만들어지는 내 마음 속의 세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또 너무 흔히 듣는 상투적인 문구 아닌가?

나는 이 말을 좀 더 강한 의미로, 곧이곧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글자 그대로, 무언가 맘먹고 하는 하나의 행동이 이제까지 있던 것과 다른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말로 이해하고 싶다. 가령 라이프니츠 말처럼, 아담이 사과를 딴 세계와 따지 않은 세계는 결코 같을 수 없는 다른 세계다. 어떤 물리학자들은 이를 ‘평행우주’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한다. 아담이 사과를 딴 세계가 여기 있다면, 따지 않은 세계는 저기 평행한 저편 우주에 따로 있다고. 요컨대 아담이 사과를 딴 행위는 그렇지 않았을 때와 전혀 다른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아담만 그러할까? 이어서 말하면, 카인이 아벨을 죽인 세계와 죽이지 않은 세계 또한 결코 같을 리 없다. 카인 역시 자신의 행위로 하나의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비슷하게, 오조(五祖) 홍인이 혜능에게 의발을 건넨 세계와 그러지 않은 세계 또한 같을 리 없다. 다시 말해 홍인은 아직 계도 받지 않은 행자에게 의발을 넘김으로써, 그러지 않았을 때와 아주 다른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아담이나 혜능, 임제 같이 ‘역사’를 바꾼 인물들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얼른 떠올리는 세계의 ‘스케일’은 다를지 몰라도 사실 누구든 자신의 인근에 영향을 미치는 특이적인 행동을 하는 순간 그 이전, 그러지 않았을 때의 세계와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 소설 같은 서사문학이 다루는 게 바로 이것이다. 어떤 특이적인 인물의 행동이 만들어내는 다른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가령 에밀리 브론테의 유명한 소설 ‘폭풍의 언덕’은 이를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야기는 언쇼가 히스클리프라는 버려진 집시 아이를 주워오면서 시작된다. 언쇼는 그를 아끼지만 그의 부인이나 아들 힌들리는 그를 미워하고 딸 캐서린은 그를 좋아한다. “그렇게 그 아이는 처음부터 집안에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언쇼 부인은 그로부터 2년도 못되어 세상을 떠났는데, 이미 그때부터 어린 도련님[힌들리]은 아버지는 자기를 박해하는 압제자이고 히스클리프는 부친의 애정과 자신의 특권을 빼앗은 찬탈자라 생각했고, 이런 부당함을 곱씹으며 원한을 쌓아갔답니다.”(‘폭풍의 언덕’, 문학동네, 62~63) 히스클리프를 주워온 언쇼의 행동 하나로 그의 인근에 다른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히스클리프의 출현, 혹은 그의 존재는 그렇게 ‘폭풍의 언덕’이라 불리는 집 인근의 세계를 바꾸어놓는다.

언쇼가 죽자 대학에 가면서 집을 떠났던 힌들리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돌아오고, 멀리 ‘티티새 지나는 농원’에 사는 에드거 남매가 등장하면서 ‘폭풍의 언덕’에는 또 다른 세계가 만들어진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에게 공부를 못하게 하고 일만 하는 하인으로 만들어 학대한다. 그 세계 속에서 에드거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사이에 끼어든다. 오빠의 학대로 천하고 가난하게 된 히스클리프와 잘 생기고 부유한 에드거 사이에서 캐서린은 에드거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이를 안 히스클리프는 집을 나가버린다.

히스클리프는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를 떠나고, 그로써 다시 또 다른 세계가 만들어진다. 캐서린이 에드거의 청혼을 받아들인 세계와 그러지 않고 히스클리프와 사랑하고 결혼했을 세계는 더할 수 없이 다른 세계다. 이런 식으로 힌들리도, 에드거도, 캐서린도, 히스클리프도 ‘한 손가락을 들어’ 그때마다 다른 각각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몇 년 뒤 히스클리프가 돌아온다. 그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서 또 다른 세계가 만들어진다. 여전히 지울 수 없는 캐서린에 대한 광적인 사랑, 그를 빼앗아 간 애드거와 그렇게 하도록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힌들리에 대한 분노와 원한 속에서, 캐서린을 되찾고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의 히스클리프는 이전과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 거기서 캐서린은 눈빛마저 달라진다. “번득이는 눈빛 대신 꿈꾸는 듯 우수 어린 부드러움이 생겼습니다. 두 눈은 주변의 사물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저 너머를, 저 너머의 너머를 응시하는 것만 같았지요. 이 세상 너머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248)

사람만이 아니라 집과 대기조차 달라진다. “한때는 그토록 쾌적했던 집이 그렇게 스산하고 음침할 수가 없었어요!”(231) 옆에서 그걸 지켜보아야 했던 하녀 딘은 말한다. “그가 나타나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요. 그의 방문은 저에겐 끝나지 않는 악몽이었고, 제가 짐작하기로는 나리[에드거]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172) 그러나 그가 나타나지 않은 세계는 평행우주의 저편으로 갈라져 날아가 버렸기에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마음을 내고 손가락을 들 때 만들어지는 세계는, 손가락을 든 사람의 마음 안에서 만들어지는 내면의 세계, 주관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인근에 있는 이들의 관계가 모두 달라지고 집의 공기와 사람의 눈빛마저 달라진 객관적인 세계고, 돌이키고 싶어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외부적인, 즉 손밖에 있는 세계인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solaris0@daum.net

[1396호 / 2017년 6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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