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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흙덩이를 쫓지 말고, 흙덩이 던진 사람을 물어라

기자명 정운 스님

밖에서 찾으면 진리는 더욱 멀어진다

원문: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구하는 자를 성문이라고 하고, 인연법을 관찰해서 깨닫는 자를 연각이라고 한다. 만약 자기의 마음 가운데서 깨닫지 못한다면, 비록 성불했다고 해도 ‘성문의 부처’라고 한다. 도를 배우는 구도자들이 교법에서만 깨달음을 구할 뿐 심법 위에서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는 수겁을 수행한다고 해도 부처가 될 수 없다. 만약 심법에서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교법에서 깨달으려고 한다면, 이는 마음을 가벼이 여기는 일이다. 교법만을 귀하게 여긴다면, (흙덩이를 던진 사람은 물지 않고) 흙덩이를 쫓는 개의 꼴과 같다. 이는 근본적인 심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근본적인 심법에 계합코자 한다면, 달리 법을 구할 필요가 없다. 마음이 곧 심법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스승 있어도
본분사 해결은 결국 본인 몫
교학은 기록 옮겨온 것 불과
자기 마음에서 해탈 구해야

해설: 성문승은 사성제 법문을 근거로 깨달음을 구하는 이들이며, 연각승은 십이연기를 토대로 공부하는 이들이다.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면서 대승의 행자라고 자칭했던 이들이 보살이다. 보살대중은 이전의 교단 수행자들을 비판하며, 그들을 성문과 연각이라고 칭했다. 황벽의 어록은 대승불교적인 입장이므로 성문과 연각을 수행 계위상 낮추어 보는 측면이 있다. 원문에서 ‘자기의 마음 가운데서 깨닫지 못한다면’을 보기로 하자. 이 내용은 타인을 통해서나 교법을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그 반작용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도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수행자 자신 밖의 타인, 즉 스승과의 관계를 보자. 스승은 제자를 인도하는 선지식이지 깨닫게 해줄 수는 없다.

당나라 때에 오설 영묵(五洩靈?, 747~818)은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길녘, 마조 선사가 머물고 있던 홍주 개원사를 찾아갔다. 오설이 마조와 마주 앉아 대화를 하는 중에 ‘과거시험 보러 가는 중’이라고 하자, 마조가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가까운 곳을 놔두고 너무 멀리 가는군.” 이 말 한마디에 오설은 출가를 한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마조가 삭발시켜주지 않자, 오설은 스승에게 삭발을 해달라고 조른다. 이때, 마조가 이런 말을 하였다.
“머리를 깎아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네만, 자네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과는 별개의 문제이네.”

곧 아무리 뛰어난 스승 옆에 있어도 해결해야 할 본분사는 본인이며, 출가했다고 금방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다. 수행이 아닌 사찰에서의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불자가 스님께 고액의 축원비를 주었다고 모든 일이 소원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열반할 때, 제자들에게 ‘사리를 섬기지도 말고, 모든 것이 무상하니, 각자 열심히 정진하라’고 당부하였다. 또한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화상도 열반직전 제자들에게 “절대로 밖을 향해서 찾지 말라. 밖에서 찾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멀어질 뿐이다”라는 유훈을 남겼다.   

두 번째로 깨달음에 있어 교법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곧 실참이 반드시 필요하다. 필자도 황벽처럼 실참의 중요성이 지당하다고 보지만, 불교학도 절대 가벼이 여길 수는 없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교선일치적인 면을 보기로 하자.

우리나라 불교는 대체로 원융사상을 지향하다 보니, 보조 지눌(1158~ 1210)의 선교일치 사상에 기울여져 있다고 사료된다. 지눌은 평생 세 차례의 깨달음이 있었는데, 2차 깨달음은 대장경을 열람하면서 깨달았다. 곧 지눌은 이통현 장자의 ‘신화엄경론’을 읽고 “세존이 입으로 설한 것이 교요, 조사가 마음에 전한 것이 선이다”라고 하면서 선교가 다르지 않음을 알고, 환희심을 얻었다. 중국의 대표적인 선사이자 경사(經師)인 규봉 종밀(圭峯宗密, 780~841)도 ‘원각경’과의 교선일치를 강조하셨다. 이렇게 선사들이 경전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교학을 낮춰 볼 수 없다는 점이다.   

‘흙덩이를 쫓는 개’는 자신의 마음에서 해탈을 구하지 아니하고, 교학만을 추구하는 경우를 말한다. ‘오등회원’에 ‘한로축괴(韓?逐塊) 사자교인(獅子咬人)’이라는 말이 있다. 흙덩이를 던지면, 한나라 개는 흙덩이를 쫓아가는데, 사자는 흙덩이 던진 사람을 무는 것을 말한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396호 / 2017년 6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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