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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들어가긴 어디로 들어가나

지혜는 따뜻한 자비, 자비는 눈 밝은 지혜 낳아야

수보리 어의운하 수다원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부? 불야세존 수다원명위입류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 시명수다원.

수행은 메마른 지혜 아닌
맑고 따뜻한 자비의 완성
불교 사상 기반한 세상은
지혜 넘어 보살행의 세계

‘금강경’은 한 편의 교향곡이다. 주제가 끝없이 변주되며 연주된다. ‘A는 A가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A일 뿐이다.’ 전원 교향곡처럼 아기자기한 진리의 풍경이 심안(心眼)에 끝없이 펼쳐진다.

동양인 노자는 ‘명가명 비상명(시명명 是名名)’이라 했다. 서양인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다. ‘언어는 실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언어의 의미는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이 결정한다.’ A라는 이름의 배후에는 A라고 할 만한 (불변의) 실체가 없다. 이 A는,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보살·중생·여래·세계·우주를 넘나들며 끝없이 변주된다. 때로는 여울을 따라 얕게, 때로는 소를 따라 깊게, 때로는 울돌목을 따라 빠르게 때로는 섬진강 하구를 따라 느리게, 때로는 만주벌판으로 넓게, 때로는 텃밭으로 좁게, 우리를 밀고 당기며 감추어진 세계의 실상(實狀)으로 인도한다. ‘금강경’의 세계로 들어서는 순간, 백두산·지리산·묘향산·구월산의 풀·나무·자락·기슭·정상·동굴·동물들을 쓸고 지나가는, (불변의) 실체 없는 바람이 만드는 대자연의 웅대한 교향곡을 듣는다.

서양과 동양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양은 고대에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멀게는 쇼펜하우어·니체·비트겐슈타인이, 가깝게는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등 위대한 사상가들이 주체와 객체를 해체하며 무아론에 근접했지만, 결코 위대한 인격을 이루지 못했다. 분쟁을 종식시키고 화쟁(和諍)을 이룰 통섭을 이루지 못했다. 자비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의 ‘폭력적인 창조’와 ‘일방적인 구원’과 ‘폭력적인 처벌’과 ‘신과 인간 사이의 (독재적) 명령과 (노예적) 순종’이라는 위계질서는, 서양 실존주의 철학의 ‘던져진 존재’의 기원이다. 자연·생물·인간이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평등함을 보지 못했다. 그 평등이 어떤 초자연적 존재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이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불교적 수행이란 메마른 지혜의 완성이 아니다. 따뜻한 자비의 완성이다. 감정은 번뇌의 근본이기도 하지만, 위대한 인격의 완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번뇌 즉 보리’이다. 동양의 수행자들이 차가운 형광등이 아니라 따뜻한 촛불인 것은 자비 때문이다. 신약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은 말한다. ‘내가 산을 움직일 믿음이 있어도 그리고 모든 지식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이다.’ 이런 사랑은 신에 대한 완전한 헌신으로도 오지만, 진정한 사랑은 ‘그런 헌신을 하는 자에게, 나아가, 신에게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깨달음에서 온다는 게 불교의 입장이다. 지혜에 기초한 자비는, 바람에 아니 뫼는 뿌리 깊은 나무이고, 가뭄에 아니 마르는 깊은 샘물이다. 불교적 사상에 기반한 사회는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사회이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사회는 자연에 대한 지식을 적대시하지 않는다. 모든 자연현상은 신비로운 무아의 펼침인 진공묘유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자연계를 하나님의 영광의 표현이라 보지만, 불교는 무아(연기緣起)의 펼침으로 본다. 유아와 무아의 차이이다. 엄청난 차이이다. 불교의 심오함은 입문한 자의 자아를 송두리째 앗아간다.

수다원은 성인의 흐름에 들어간 자를 말한다. 불교는 전통적으로 부정(negation)의 종교이다. 무상·고·무아가 다 부정어이다. 우리의 고통은 세상에 대한 전도된 몽상으로부터 오므로, 그 견해들에 대한 총체적인 부정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8종의 조사 용수는 중론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negation)으로 일관한다. ‘거자불거(去者不去)’ ‘견자불견(見者不見)’ 등이다. 상식의 부정이다. 유정(有情)의 세계이건 무정(無情)의 세계이건, 거기 주어로 삼을 만한 (상주불변하는)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갈 주체도 없다. 그래서 결국 아라한이란 법은 없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면 불교가 아니다. 이건 지혜이다. 지혜를 넘어 자비로 가야 한다. 그래서 보살행이 나오는 것이다. ‘금강경’은 강조한다. 지혜는 따뜻한 자비를 낳아야 하고, 자비는 눈 밝은 지혜를 낳아야 한다. 진공묘유 묘유진공이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396호 / 2017년 6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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