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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윤희

기자명 구담 스님

기억은 광대의 유희로 승화되리

▲ 기억의 간격-반야용선도(부분).

서울 조계사 부근 한 미술관에서 1층부터 3층까지 전관을 ‘기억의 간격’이라는 주제로 가득 채운 작품을 보았다. 그중에서 불화(佛畵) 도상을 차용한 ‘열반도’와 ‘반야용선도’ 등의 몇 작품으로 작가의 ‘기억’이라는 주제와 연관되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불교라는 전통의 도상 안에서
회귀·윤회하는 기억의 조각들
기억은 지금의 적나라한 현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그간 전통 수묵화를 이 시대의 다양한 기법으로 그려내면서 주로 한지에 얼룩진 흔적이 퍼지는 자연스러운 추상성을 견지하는데, 화면의 곳곳 여백에 세밀하게 그려 넣은 작은 인물들을 통해 파편화된 기억들이 인(因)과 연(緣)으로 서로 의지하는 상입상즉(相入相卽)의 이야기보따리를 차분하고 명징하게 풀어 보였다.

그러한 작가 서윤희를 절집 지대방에 모셨다. 필자는 몇 잔의 녹차를 우려내고 저 과거를 서슴거리는 작가의 기억 사이로 찻잔이 한 순배 돌자, 이윽고 대화의 꽃향기가 피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절과 인연이 깊었다. 꼬박 절을 찾지는 않지만 지금도 매일 오전에 108배를 하며 작업을 시작한다. 언젠가부터 인간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 불편해지고 작가세계의 자존감이 공허할 무렵, 2년 전 조계사에서 불화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불화를 배우는 과정은 상실감을 메우는 치유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간 고단했던 질곡의 작가세계와 삶의 편린들이 제 짝을 찾아가면서, 불화 속에서 비로소 내가 아닌 내 주위를 돌아보게 되는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 기억의 간격-열반도(부분).

“기억의 간격(Memory Gap)은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포함한 삶의 흔적을 의미합니다. 구름처럼 혹은 물처럼, 아니면 기암괴석 같은 지형적 윤곽처럼 화면 속에 정착된 색면은 나의 기억속의 흔적이자, 내 삶의 사유공간이 됩니다.”

작가의 말대로 기억은 범신론적 사유에 해당한다. 삶의 흔적이라는 업(業)의 흔적과 기록들이 윤회를 하듯, 시시각각 변화하는 육도윤회의 세계가 바로 화폭에 담겨진다. 그러고 보면 서윤희에게 기억이란, 지금 삶의 적나라한 현실의 존재이자 반영인 것이다.

작품 ‘열반도’와 ‘반야용선도’에서 불교라는 전통의 도상 안에 기억의 조각들이 염원과 치유, 해탈과 해방으로 회귀하고 구현되고 윤회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 불교에서 윤회는 실상(實相)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실상은 참된 본성이다. ‘금강경’에서 실상이라는 것은, 상을 떠났기 때문에 실상이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서윤희의 기억이 과거의 반복적 재현이 아닌 지금 삶에서의 진리를 드러내는 수단으로서의 기억이 될 것임을 믿고 싶다.

10년 전 관객이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차마 울음을 터뜨렸던 그때, 작가와 관객의 내밀한 동질감이 절실함으로 다가와 작업의 자신감으로 승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불화를 통해 기억의 진리를 모색함으로써 좀 더 생의 유희에 가까이 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만히 보면, 과거의 기억이라는 게 대개 들추면 들출수록 불편해지는 조건반응과 같아서 그저 묵혀두는 게 더 다행스런 경우가 많다. 반면에 작가의 숙명이란 펄럭이는 저 바람의 뜻을 묻는 광대의 기원과도 같아서 기억을 들추어 예시를 이끌어내는 기예를 보이게 되어 있다.

왜 불화를 그리는지 의아해하는 주위의 시선과 관계없이 불교작가로 몰두하는 진정성을 더 선보임으로써 기억의 범주를 일탈한 해탈의 길로 가보시길 권한다. 작가의 오는 9월 이스탄불 비엔날레 전시가 기대된다.

구담 스님 불일미술관 학예실장 puoom@naver.com

기억의 간격-열반도(부분).

 

[1396호 / 2017년 6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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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간격-반야용선도(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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