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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천양희 시인

“시와 부처님은 운명…어둠 속 빛나는 별처럼 살겠다”

▲ 천양희 시인은 사막 속에 오아시스가 있듯이 절망의 긴 터널 끝 어딘가에 빛이 있다고 말한다.

죽겠노라 뛰어내린 곳이, 결국 하얀 종이였다.

이화여대 3학년 시절인 1965년
박두진 추천 ‘현대문학’서 등단

아이와 이별·폐결핵 등 상처 커
10년 방황하며 죽음·출가 시도
직소폭포·수수밭·반야심경 등
오랜 치유 과정 거쳐 시로 극복

8번째 시집으로 ‘새벽에~’ 출간
삶 바라보는 달라진 시선 담겨
“웃음도 울음 지불해야 꽃 펴”

▲ ‘새벽에 생각하다’ /천양희 저 / 문학과지성사
폭포로, 강원도 오지 절로, 수수밭으로 정처 없이 방황했다. 상처 입은 마음 부린 곳이 없었다. 고통은 예고 없이 들이닥쳤고, 누군가의 30대 시절은 너무 아팠다. 유복했던 종갓집 7남매 중 막내딸로 부모님 사랑받으며 자랐던 여인에게 시련은 낯설고 두려운 존재였다. 눈물은 울음이, 흐느낌은 통곡이 됐다.

“눈물이 한때 삶의 절망을 메워주는 힘이 될 때가 있었다. 내가 고립을 선택했을 때 ‘나에게 남은 유일한 진실은 내가 이따금 울었다는 사실뿐(알프레드 뮈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또 다른 시간 또 다른 나와 겨루었고, 내가 달아나고 싶은 건 이 땅이 아니라 나였다.”(‘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중)

시인 천양희(75)는 이화여대 국문학과 3학년이던 1965년에 시인 박두진 추천으로 ‘현대문학’에서 등단했다.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했지만 이혼했고, 5살 아이와도 멀어졌다. 그해 아버지와 어머니도 한꺼번에 세연을 접었다. 고통이 밀물 때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폐결핵까지 앓던 그녀는 세상으로 뻗었던 손을 거뒀다. 그리고 폐어처럼 살았다. 열흘 동안 죽은 듯 흙 밑에서만 사는 물고기처럼, 그녀도 10여년 동안 고독 속에 자신을 가뒀다.

“시집 내기 전 죽은 듯이 살았어요. 첫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평민사, 1983)이 나오고 나서 숨을 쉬기 시작했지요. 시가 나를 구원한 셈인데, 인생에서 가장 고마워하는 것이 부처님과 시에요. 힘이자 짐이고 괴로움이자 기쁨이에요. 쓸 땐 짐처럼 무겁고 괴롭지만 좋은 시 한 편 쓰면 힘이 생기고 기뻐요.”

시인 말처럼 시는 그에게 ‘절망이 부여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다. 죽겠다고 찾아간 장소가 내변산 직소폭포였다.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버리고 싶었다. 7월이었다. 장마라 폭포소리는 판소리 절창 같았다. 어디선가 ‘너는 죽을 만큼 살았느냐’는 목소리가 들렸다. ‘인생은 한 구절의 보들레르보다 못하다’며 자살한 일본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말이 생각났다. ‘당신은 죽어서도 보들레르보다 나은가 못한가’ 자문했다.

도피처로 출가도 고민해봤다. 강원도 어느 절에 이름만 듣고 무작정 찾아갔다. 3월이었다. 땅과 공기가 찼고, 잔설이 있었다. 문득, 시선이 초록 풀에 가 닿았다. 잔설 뚫고 올린 생명력이었다. 너무 건방졌다. ‘이름 없는 풀도 저렇게 살려고 하는데….’ 모두 괴로움 짊어지고 한 인생 살아가는데 무겁다고 버리겠다고 피하려고 한 자신을 봤다. 그리고 드넓은 불교의 세계에 뛰어들려고 한 무모함을 야단쳤다. 거기서 수수밭을 만났고, 바람 스치며 우수수 흔들리는 소리에 주저앉아 있던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죽을 듯이 아플 때 ‘반야심경’도 읽었다. 이미 책꽂이에 있던 책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때부터였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죽는 것도 사는 것만큼 힘들어요. 길이 끝나는 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직소폭포, 강원도 오지 절을 찾아가던 길목서 만난 초록 풀 그리고 수수밭에서 생의 의지를 발견했어요. 아직 죽을 만큼 살지 못했지요. 시인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 마지막 연의 첫 머리가 좌우명이 됐어요.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에요.”
간디 말처럼 삶은 죽음에서 생길지도 모른다. 보리가 싹트기 위해서는 씨앗은 죽어야 하니까. 천양희는 살고자 시를 썼다. 첫 시집 이후 정진하듯 꾸준하게 썼다. ‘사람이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를 내놨다.

시어에는 절실함을 새겼다. 온실 속 화초로 대변되는 아름다움과 구별되는 혹독함도 있다. 현실이라는 절박함에서 생기는 고통과 외로움이 삶을 향한 고귀한 생명력으로 되살아났다.

세상은 상처가 피워낸 꽃에 공감했다.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박두진문학상, 만해문학상 등 국내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지난 3월, 등단 52년째가 된 천양희는 8번째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를 낳았다. 절망 지나 희망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힘찬 여정이 시 61편으로 엮였다.

“시를 쓰고 산다는 것은 자발적 소외에요. 고독을 자청하고 자신을 황무지에 유배시켜야 하죠. 그렇게 메마르면 어떻게 꽃을 피우냐고요? 황무지에서 멈추는 게 아니에요. 비옥한 땅으로 걸어가야 해요.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잖아요.”

천양희의 시심이 바라보는 나무도 바람이 있어야 산다.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다면 그냥 서 있을 뿐이다. 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춤추며 살아있다고 몸짓한다. 꽃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시선을 받고 그제야 꽃이 된다. 네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네가 있었다. 생각이 달라졌다.

“웃음과 울음이 같은 音이란 걸 어둠과 빛이/ 다른 色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 내 音色이 달라졌다// 빛이란 이따금 어둠을 지불해야 쐴 수 있다는 생각// 웃음의 절정이 울음이란 걸 어둠의 맨 끝이// 빛이란 걸 알고 난 뒤/ 내 독창이 달라졌다// 웃음이란 이따금 울음을 지불해야 터질 수 있다는 생각//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별처럼/ 나는 골똘해졌네.”(‘생각이 달라졌다’ 중)

돌이켜보니 깊은 불연과 사랑하는 가족, 친구가 천양희 인생의 자양분이었다. 상처 위에 꽃을 피울 수 있었던 힘이기도 했다. 출가를 꿈꿨던 할아버지 입에서는 ‘천수경’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새벽녘 소변 마려워 대청마루 지날 무렵이면 늘 사방에 합장 인사하고 집을 돌았던 할아버지였다. 어머니는 십리 길 밖 운수사로 막내딸 손잡고 걸었고, 문밖 거지에게도 상 위에 밥을 얹어 내놓는 보살이었다.

도반인 남지심 작가와 청화 스님을 생전에 2번 친견했고, 성철 스님 다비식에 참석했으며, 법정 스님 열반에 조시를 썼다. 마른 나뭇잎 팔랑팔랑 움직이듯 가볍게 걷고 청빈했던 스님들 모습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요즘도 매일 할아버지가 했던 ‘천수경’의 정구업진언 되새기며 마음속에 도량 하나 짓고 스님들 지나칠 때면 ‘정진하십시오’ 되뇐다. 시를 쓸 때면 항상 손을 씻고 정갈하게 앉아 교자상 위에서 자필로 쓴다. 편하고 싶은 여러 번뇌와 자신(아상)을 절단 내지 않고서는 하심이 되지 않아서다. 낮추지 않으면 시가 되지 않아서다.

시인 천양희가 죽어야 사는 게 시였다. 상처 위에 핀 것은 꽃이자 시였다.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 ‘시가 죽은 사회’를 ‘시 권하는 사회’로 만들고 싶다. 시가 ‘전자사막 속 오아시스’이기 때문이란다.

“눈을 뚫고 꽃 피우는 파설초를 보며 내가 넘어온 시의 오십 계단을 생각해요. 시의 샘이 마르지 않도록, 시심에 잡초가 돋아나지 않도록 그렇게 살다가 지는 해의 모습이 정말 좋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6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발길 돌리는 시인 천양희 곁으로 바람이 한 줄기 선을 긋는다. 그 바람 꽁지 따라가니 길가에 핀 꽃이 노란빛깔 흔든다. 시인이 웃는다. “자기 봐달라며 예쁘게도 피었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천양희 추천도서]

 

 
‘나뭇잎이 나를 잎사귀라 생각할 때까지’
저자 롭상도르찌 을지터그스·역자 이안나 / 이룸
“몽골의 젊은 여성시인의 시집이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하다. 생의 본질에 대한 갈망이 담겼다.”
현대 몽골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의 작품을 첫 번째 추천도서로 권했다. 현대적인 시풍을 보이면서도 몽골의 전통적인 서정성과 자연에 대한 관조적 색채가 배어 있다. 세련된 감수성과 종교적이고 공동체적인 인식이 깔려있다.

 

 

 


 
‘선의 황금시대’ / 저자 John C.H.Wu / 한문화
혜능, 마조, 백장, 황벽, 임제, 운문 등 고승들의 가르침을 담은 명저다. 당나라 시대를 중심으로 여러 선사들의 일화와 선시 등을 소개하고, 그들의 사상에 대해 해설한다. 1967년 초판 발행 이후 지금까지 선의 텍스트로 남아 있을 만큼 고전이 된 책이다.
천양희는 “종교적 경험의 본질을 통찰했다”며 “선이 일상에서 되살아날 때 생명력을 갖는다는 가르침이 있다”고 추천했다.

 

 


 
‘산해경’ / 저자 정재서 / 민음사
천양희는 “동양 최대의 기이한 책이다. 흥미진진하고 상상력이 풍부해진다”며 웃었다.
중국서 가장 오래된 신화집을 추천하면서다. 중국과 변방 지역의 기이한 사물, 인간, 신들에 대한 기록과 그들을 표현한 그림이 함께 실려 있다.
꿈과 무의식에 뿌리를 둔 원형적 이미지들을 집대성한 상상력과 환상의 결정체다.

 

 


 
‘책상은 책상이다’ / 저자 피터 빅셀 / 예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 많은 남자가 침대를 사진으로 부르는 등 대상의 이름을 바꾸면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결국 남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 말을 잊고 소통이 불가능해졌고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천양희는 “발상이 재밌는 이야기다. 요즘 소통부재로 외로워지는 이들이 많은데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설명했다.

 

 

 


[1398호 / 2017년 7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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