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58. 제주도 성지순례 ④ 관음사-법화사-약천사

기사승인 2017.07.17  15:12:52

공유
default_news_ad1

- 억불과 토벌로 점철된 역사임에도 불심만은 펄떡인 땅

   
▲ 관음사가 중창될 때 제주불교는 펄떡였고, 관음사가 황무지로 변할 때 제주불교는 힘을 잃었다. 제주불교의 중심 축 역할을 100년 동안 담당하고 있다.

뭍에서 추사를 만나기 위해 바닷길을 건너 제주에 온 초의가 6개월을 머물렀다는 산방산 중턱의 산방굴사. 추사가 이 토굴에서 ‘반야심경’을 사경했다고도 전해져 산방산 찾은 사람들의 발길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노란 유채꽃 만발할 때, 아니 푸른 청보리 익어갈 때, 짙은 녹음 우거질 때, 아니 붉은 동백 필 때, 그 어느 날엔가 산방산 올라 마주하고 있는 한반도 끝 섬 마라도를 바라본다면 산방굴사에 좌복 펴고 삼매에 들었던 고려의 혜일(慧日) 스님을 떠올려봄직하다.

이형기 제주 목사 재임 때
1000개 불상 바다에 던져
‘4·3 항쟁’ 당시 토벌대에
사찰 불태워지고 강제철거

‘3·1운동’보다 1년 빠른
‘무오년 항일’ 법정사가 주도
전통의 관음사·신흥 약천사
제주불교 중흥의 ‘중심 축’


제주의 ‘풍속’과 ‘토산’, ‘과원’ 등을 상세히 담은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 1653년 간행)’에 따르면 혜일 스님은 거상 김만덕, 명마(名馬) 노정(盧正)과 함께 제주도의 삼기(三寄)로 불렸다고 한다. 행장이 없어 스님의 여정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탐라’가 고려의 ‘제주’로 편입된 직후 이 섬에 걸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머무르며 쓴 시가 전해지고 있는데 법화사를 소재로 한 시 한 편도 남아 있다.

‘법화암 물가 경치 그윽하니/ 대(竹) 끌고 솔(松) 휘저으며 홀로 노닌다/ 만약 세간상이 상주하는 소식을 묻는다면/ 배꽃은 어지럽게 떨어지고 물은 달아나 흐른다 하리라!’(法華庵畔物華幽 曳竹揮松獨自遊 若間世間常住相 梨花亂落水奔流)

   
▲ 관음사 일주문과 대웅전을 잇는 숲길에 아침 햇살이 들어차고 있다.

노을빛 머금은 구품연지가 고풍스럽게 정좌한 구화루(九華樓)를 안았다. 서산으로 기우는 해가 붉은빛마저 토해내고 나면 물가 따라 둥글게 줄지어 달린 연등에 불이 밝혀질 터! 고즈넉했던 법화사는 더 깊은 침묵 속으로 침잠해 가겠지만 구화루는 무상법문 한 토막 별빛에 실어 보낼 것이다.

‘그대 머문 이곳이 극락이다!’   

법화사 창건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후기 중국과 일본을 무대로 활약했던 장보고가 건립했다는 설이 있어 흥미롭다. 장보고는 바닷길 오르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주요 주둔지에 법화사를 세운 바 있는데, 완도 청해진의 법화사와 중국 산둥반도의 법화원이 대표적이다. 제주 법화사 역시 중국과 일본과의 무역로 확보를 위해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미륵대불과 관음사 전경.

고려시대의 법화사는 존자암, 수정사와 함께 제주도 3대 비보사찰이었다. 이 절에는 원나라 장인이 조성한 아미타삼존상이 봉안돼 있었는데, 재밌는 사실은 훗날 명나라가 ‘법화사 아미타삼존상 반환’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중국 사신 황엄 등이 제주도의 법화사(法華寺) 아미타삼존상을 도로 가져 가겠다’하는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연간 기록이 방증하고 있다. 조선의 태종은 아미타삼존불을 숨기기 위해 감실을 만들었는데 높이와 폭이 각각 7척, 약 2m12cm이었다고 한다. 나주로 숨겼던 삼존불은 결국 명나라 사람들에게 넘겨졌다. 법화사가 원나라 황실의 원찰로 세워졌거나 또는 그 역할을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원나라가 제주를 지배했던 역사의 한 단면이다.

조선 태종 때까지만 해도 280여명의 노비가 상주했을 정도로 제주 최대 사찰이었던 법화사는 숭유억불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 명맥을 잃어갔다. 뭍에서 사찰을 기생관으로 쓰는 유생들의 악업이 자행될 때, 제주 도량 역시 그들의 손에 헐어지고 있었다. 1530년에는 15개의 사찰이 미미하게나마 제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18세기 접어들며 그 마저도 사라지는 위기에 처해졌다. 1703년 제주 목사(牧使) 이형상은 자신의 저서 ‘남환박물(南宦博物)’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온 섬 500리에 사찰이나 불상이나 승니는 없고, 염불자도 없으니 불도의 액(厄)이라 말할 수 있다. 해륜사와 만수사를 헐어 관가의 건물을 짓도록 했다.’

   
▲ 법화사 구품연지가 품은 구화루.

이형상의 제주 고을 순찰 상황을 그린 도첩 ‘탐라순력도’에 산방굴사가 묘사돼 있다. 부처님이 앉아 계실 자리에 의관을 갖춘 사람이 유생이나 벼슬아치로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술잔을 받으려는 모습이다. 상석에 앉은 인물은 분명 이형상 목사일 것이다. 그의 재임 당시만 해도 1000개의 불상이 바다에 던져졌다.

4·3항쟁 때 중산간 일대의 마을이 불타면서 법화사지가 드러났다. 1982년부터 발굴이 진행됐고 1987년 대웅전이 들어섰다. 발굴 과정에서 조사단은 혜일 스님의 시에 주목했다.

‘법화암반물화유(法華庵畔物華幽)’에서 ‘반(畔)’은 밭두렁, 땅의 가장자리를 뜻해 길가의 ‘가’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반’은 물가를 뜻하기도 한다. 연못이 존재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발굴한 결과 불국사 앞의 ‘구품연지’와 유사한 연못이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 법화사 대웅전.

이에 따라 2001년 구품연지가 조성됐고, 2004년에 구화루가 지어졌다. 2007년부터 일주문, 사천왕, 나한전 등이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뒤 한쪽에 옛 법화사지가 아직 남아 있으니 복원불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라 하겠다.

한라산 동북쪽 기슭에 관음사(觀音寺)가 있다.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관음사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 초기 때까지도 범종이 울렸던 절이었으나 제주 목사 이형상이 끝내 폐사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절을 다시 중창한 인물은 비구니 안봉려관(安蓬廬觀). 안봉려관 스님은 떠돌이 무당이었다. 비앙도로 가던 중(1901년) 풍랑을 만나 생사를 헤맸는데 관음보살의 가피를 입어 살아났다고 한다. 지금의 해월굴(1908)에서 3년 동안 관음정진하며, 불사를 일궈 법당과 요사채를 완공(1912년)했다.

관음사 중건은 제주 불교사에서 한 획을 긋는 불사로 기록될 만하다. 관음사 불사를 시작으로 원당사(현 불탑사)를 비롯해 극락사, 산방사, 용주사, 금봉사, 무관암, 원만사, 용장사, 서림사 등이 연이어 세워졌기 때문이다. 사찰 중창은 곧 제주불교협회를 태동(1924년)시켰다. 1940년대에는 승가교육, 선농불교운동, 제주불교 혁신승려대회 등이 전개되며 제주불교가 다시금 펄떡이기 시작했다. 이즈음 관음사와 연관된 사찰만도 70여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 제주불교에 새 힘을 불어 넣고 있는 약천사.

관음사 중건 6년 후인 1918년 한국사와 제주불교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발생한다. 항일항쟁의 횃불이 시뻘겋게 타 올랐던 것이다. 김연일, 강창규, 방동화 스님 등 여덟 명의 스님과 법정사(法井寺) 신도, 주민 등 400여명이 합심해 일본인 관리와 상인 축출은 물론 국권회복을 갈망하며 일으킨 항쟁이었다. 1918년이 무오년이어서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칭하고 있다.

그러나 관음사는 제주 4·3항쟁(1947~1954년) 당시 토벌대에 의해 완전히 전소됐다. 제주를 대표하는 주요 사찰도 그때 대부분 불태워지거나 철거당했다. 고운사, 귀이사, 서관음사, 은수사, 소림사 등은 아직도 복원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1919년 ‘기미년 3·1운동’ 보다 1년 앞서 항일운동이 펼쳐진 고장에, 그 저항운동을 주도한 불교계에서 벌어진 토벌대의 악행은 조선 유생들의 훼불과 비교해도 결코 가볍지 않다.

토벌대에 의해 피폐해진 황무지에서 새 연꽃을 피워낸 도량 또한 관음사였다. 1969년 대웅전을 시작으로 선방, 영산전, 종각불사가 진행돼 명실상부한 대가람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를 기점으로 산방산에 자리했던 사찰도 다시 일어섰고, 약천사를 필두로 한 신흥사찰이 제주도 땅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법화사를 참배한 후 지근거리에 자리하고 있는 약천사로 걸음 한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높이 29m 3층으로 구조의 동양 최대 크기의 대적광전 안에 5m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 4m의 좌대 위에 안치되어 있다. 좌우 양쪽 벽에는 거대한 탱화가 양각으로 조각돼 있다.  대적광전에 들어선 순간 그 장엄함에 누구라도 절로 일어나는 환희심에 손을 모으고 만다. 이 정도면 대적광전 자체가 보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천사 내 귤나무 길을 걸으며 내려다보는 제주 해안 풍광 또한 일품이다. 제주불교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도량이다.

푸른 바다를 품에 안은 제주불교는 이제 그 바다 빛깔보다 더 맑고 푸른 청사진을 그려내고 있다. 제주로 불교순례를 떠나 보시라! 뭍에서 느끼던 희열과는 분명 다른, 새로운 환희가 충만된 불심을 얻게 될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참고자료 : 배연이 논문 ‘제주도의 불교와 불교미술 연구’.

 

   
 


[도·움·말]

길라잡이

제주공항서 관음사까지는 자동차로 30분. 가능한 아침 일찍 참배하는 게 좋다. 일주문과 대웅전을 잇는 숲길에 들어차는 금빛 햇살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보물급 문화재가 있는 산사는 아니지만 사색에 잠겨도 좋을 만큼 길과 숲이 잘 어우러져 있다. 반면 법화사는 오후 늦게 걸음 하는 게 좋다. 구품연지에 떨어지는 저녁노을이 멋지다. 법화사와 이웃하고 있는 약천사에는 귤나무가 풍성하다.


이것만은 꼭!

   
 
법화사지: 법화사는 고려시대 비보사찰 역할을 담당했던 제주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다. 법화사지 발굴을 통해 고려 왕궁지인 개성 만월대와 몽고 왕궁에서 출토되는 것과 흡사한 용과 봉황문 막새가 출토됐다. 법화사 대웅전 뒤쪽에 있다.

 

 

 

   
 
관음사 해월굴: 관음사를 창건한 해월당 안봉려관 스님이 정진했었다는 토굴이다. 법화사와 불탑사 중창불사를 이끌었고, 법정사 무오항일항쟁의 중심에도 섰던 비구니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닿기 직전 오른쪽 길가에 자리하고 있다.

 

 

 

 

 

 

   
 
관음사 나한전: 미륵대불을 참배했다면 왼쪽으로 길게 난 계단을 올라 작은 오솔길을 걸어보기 바란다. 그 길 끝에 나한전이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1400호 / 2017년 7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저작권자 ©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set_new_S1N12
set_hot_S1N12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