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72. 수행의 삶에 대한 회고-하

기사승인 2017.07.17  17:23:39

공유
default_news_ad1

- “인간불교 핵심은 노동이나 소임도 수행으로 삼는 것”

   
▲ 성운 대사의 증명으로 불광산 제9대 주지 진산식과 함께 임제종 제49대 전법식이 봉행되고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수행은 형식적인 것도 아니고 입으로 떠드는 것도 아니며 흉내를 내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진정한 재능과 견실한 배움이 가장 중요합니다. 진정한 재능과 견실한 배움이라 함은 간단하고 검박함을 추구하는 이외에 자신 역시 밥 한 그릇, 반찬 한가지의 간소한 음식과 이부자리 하나에 의자 하나의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기차를 타고 남과 북으로 다니면서 홍법교화를 할 때에는 길가 전봇대를 염주 삼아 전봇대를 한 개씩 볼 때마다 염불 한마디씩 염송하였고 길가의 행인 한 사람을 보면 또 염불 한마디씩을 염송했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저는 전봇대를 보면서 염불을 했고 전봇대가 없으면 논바닥 한 칸을 기준으로 염불 한마디를 했습니다. 제가 염불하는 부처님 명호가 전 세계와 융화되어 허공계에 두루 퍼지고 법계에 가득하기를 저는 염원하고 또 염원했습니다. 지금 불광산 선방에는 매일 입선과 방선을 알리는 법구소리가 울리고 있고 ‘정업림’(淨業林 : 염불당. 역자 주)에서는 온종일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매일 대중과 함께 동참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과거 전통적인 수행의 삶은 저의 삶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30세 이후 빈승의 사상에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수행은 형식적인 것도 아니고 입으로 떠드는 것도 아니며 흉내를 내는 것은 더더욱 아니어서 진정한 재능과 견실한 배움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재능과 견실한 배움이라 함은 간단하고 검박함을 추구하는 이외에 자신 역시 밥 한 그릇, 반찬 한가지의 간소한 음식과 이부자리 하나에 의자 하나의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는 것으로, 빈승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인연에 따르면서 걸림이 없는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에 대해 빈승의 인간불교(人間佛敎)에서는 생활 속 행주좌와(行住坐臥) 의식주행(衣食住行)을 중시해야 하고 심지어 어떠한 소임이나 노동도 수행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종의 조사대덕 스님 대부분이 일하는 속에서 자신을 독려하면서 수행을 이루셨습니다. 여러해 전 저는 강연집에서 여러 사례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설봉(雪峰) 선사는 동산(洞山) 스님 문하에서 밥 짓는 일을 맡았으며 영우(靈祐) 선사는 백장(百丈) 스님 문하에서 공양주를 맡았으며 경제(慶諸) 선사는 위산(溈山) 스님 문하에서 곡식을 관리했고 도광(道匡) 선사는 초경(招慶) 스님 문하에서 반찬통과 밥통을 씻는 소임을 맡았습니다. 또 관계(灌溪) 선사는 말산(末山) 스님 문하에서 채소밭을 관리하는 소임을 맡았고 소원(紹遠) 선사는 석문(石門) 스님 문하에서 논밭을 관리하는 소임을 맡았고 효총(曉聰) 선사는 운거(雲居) 스님 문하에서 등불과 촛불을 관리하는 소임을 맡았고 계산(稽山) 선사는 투자(投子) 스님 문하에서 나무하는 소임을 맡았습니다. 의회(義懷) 선사는 취봉(翠峰) 스님 문하에서 물 긷는 소임을 맡았고 불심(佛心) 선사는 해인(海印) 스님 문하에서 화장실의 청결을 책임지는 소임을 맡았고 라융(懶融) 선사는 공양주 소임을 맡았습니다. 또 인관 대사는 발우공양 음식을 나누고 설거지 하는 소임 등등을 전담해 맡은바 소임에 충실했습니다. 이 분들 모두 깨달으신 고승 대덕으로, 이러한 많은 소임을 맡아 몸으로 직접 증득하지 않고 어찌 깨달음을 얻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소임을 갖는 것이 바로 수행이고 발심이 바로 수행이며 고행이 수행이 됩니다.

빈승은 가정생활에서의 수행과 업무 속에서의 수행, 인간관계에서의 수행 그리고, 오욕육진(五欲六塵)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 절제하고 스스로를 초월하는지가 자신을 승화시키는 수행이라는 가르침을 인간불교를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로 불법을 펼치는 일에서도 비행기를 타는 것이 무척 힘드니 남들은 장거리 여정을 겁내지만 빈승은 책을 보거나 글을 쓰면서 여전히 비행기 안에서도 분주하게 시간을 보냅니다. 비행기 안에서의 긴 시간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해야 할 일만 생각하다보니 그 아무리 먼 여정이라도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행(修行)’을 ‘수심(修心)’이라고 바꾸었는데 마음을 닦는 것은 마음속으로부터 기질을 변화시키고 정신적으로 정화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상과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자신의 도덕적 관념과 사람의 바른 됨됨이를 기르는 것입니다. “불법의 무량한 뜻은 ‘바름’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佛法無量義 應以正為本)”고 하는 말처럼 ‘팔정도(八正道)’의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는 유교에서 ‘부족하더라도 바르게 해야 하지 남기려고 삐뚤어지게 하면 안 된다(寧可正而不足 不可邪而有餘)’는 말과도 같은 의미로, 일을 행함에 있어서 이는 중요한 원칙이며 참된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빈승은 평생 ‘인간불교’(人間佛敎)를 펼쳐왔습니다. ‘인간불교’라 함은 어느 조사 스님께서 발명하신 것이 아니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간불교의 발명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불법을 천상계와 인간계에서 설하셨을 뿐 지옥이나 축생들에게 설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간세상의 부처님이시고 인간세상에서 가르침을 전하고 진리를 펼치셨으니 그 가르침이 바로 ‘인간불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의 생명은 모두 소중하지만 인류가 만물의 영장인 까닭이 있습니다. 일체중생 가운데서 오직 인간만이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발로 대지를 딛고 서 있을 뿐 소와 돼지, 말, 양 등 동물들처럼 등이 하늘을 향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단지 인간만이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신앙 가운데서 권위적인 것을 믿지 않고 전설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스스로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할 뿐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自依止 法依止 莫異依止)”고 말씀하셨는데 이 얼마나 위대하고 더없이 숭고한 선언입니까?

‘인간불교’라 함은 개인적으로는 성실함과 신뢰를 중시하고 바름을 추구하고 자비를 중시하고 두루 인연 맺는 것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가르침과 성품이 남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남에게 받아들여지는 사람은 설사 성현 정도는 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정정당당한 인생으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사람은 가정에서는 자비로운 부모이며 효행하는 자식이어야 하며 우애 있는 형제자매여야 하는데 이는 대대로 전해지는 귀한 보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됨과 처사에 있어서 유교의 사유팔덕(四維八德)과 불교의 오계십선(五戒十善) 모두 인간세상의 불교정신이고 발보리심, 사무량심, 사홍서원, 육도만행, 계정혜 삼학 등등 모든 것들이 ‘인간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수 년 전부터 빈승은 ‘삼호운동(三好運動)’을 펼쳐왔습니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의 몸으로는 좋은 일을 하고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며 마음으로는 좋은 생각을 갖는 현대인이 흔히들 말하는 진선미(眞善美)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 하는 좋은 말은 진실한 말이며 몸으로 하는 좋은 일은 선행이며 마음으로 갖는 좋은 생각은 바로 미학(美學)이며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몸과 입과 마음의 세 가지 좋은 것이 바로 진선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국제불광회에는 네 구절의 게송과 여덟 구절의 선언을 표방하고 있는데 특히 오화(五和)의 ‘인간불교’를 특히 중시하고 있습니다. ‘오화(五和)’라 함은 첫째 따스하고 즐거운 마음(自心和悅)이며 둘째 화목하고 순조로운 가정(家庭和順), 셋째 온화하고 존중하는 인간관계(人我和敬), 넷째 화합하고 조화로운 사회(社會和諧), 다섯째 평화로운 세상(世界和平)을 말합니다.

빈승은 불타기념관에 세워진 팔탑(八塔)에 일교(一教), 이중(二眾), 삼호(三好), 사급(四給), 오화(五和), 육도(六度), 칠계(七誡), 팔도(八道)라는 이름을 각각 붙였습니다. 팔탑의 내용을 정말 실행할 수 있다면 인생의 원만한 경계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인생이 원만하니 부처님과 상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육조혜능 대사께서 “사람 사는 세상에 불법이 있으니 세간을 떠나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세간을 벗어나서 도를 추구하는 것은 흡사 토끼에게서 뿔을 찾는 것과 같다(佛法在世間 不離世間覺 離世求菩提 猶如覓卯角)”라고 하신 말씀처럼 평소 생활이 모두 자신을 바르게 닦고 정화하고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수행인연입니다.

불타기념관을 지은 주된 목적은 문화적인 행사와 교육적인 활동으로 ‘인간불교’를 널리 펼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의 사회 명사, 학자, 교수들 모두가 ‘인간불교’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대륙에서는 과거 태허 대사와 ‘조박초’ 거사 등이 제창한 ‘인간불교’를 받아들여 더욱 적극적으로 펼치려 하고 있기에 저도 인연에 맞춰 호응하며 돕고 있습니다.

어떤 신도가 “스님! 만약 스님들이 전부 무문관 수행이나 입산 수행을 가시면 저희는 누가 이끌어주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수행은 아주 중요합니다. 수행의 이름으로 세속을 등지고 현실을 벗어나는 핑계로 삼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 또 이를 표방해서 자신의 헛된 명성을 얻을 수 없으며 교묘한 명목을 붙여 대중의 환심을 사고자 해서는 더욱더 안 됩니다. 수행은 결코 아무런 내용이 없는 허무한 구호가 아니며 실제에 근거하여 견실하고 완벽한 자아로 희생하면서 이바지 하는 것입니다. ‘인간불교’의 찬란한 빛이 앞으로 이 세상을 밝게 비춰 승가와 신도의 수행규범이 될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400호 / 2017년 7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beopbo

<저작권자 ©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set_new_S1N12
set_hot_S1N12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