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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고구려의 비천상

기자명 정진희

망자 공간을 천상음악 흐르는 불국토로 승화

▲ 안악 2호분 동벽 비천상.

불교미술에서 하늘을 나는 천인상을 흔히 비천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스스로 하늘을 날 수 없기에 천상에 살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천인(天人)은 동경의 대상이자 이상적인 모습으로 생각되었고 오랜 옛날부터 미술의 주제로 사랑받아 왔다. 비천의 기원은 고대 인도신화에서 유래하며 긴나라, 건달바, 아프사라스와 같이 신의 단계는 이르지 못하나 천계에 사는 유정(有精)을 말한다. 원래 브라만교의 신이었으나 불교에 흡수되면서 여래와 보살, 명왕의 하위에 있으면서 불교를 수호하는 수호신이 되었다. 인도 불교미술에서 비천은 불상의 출현보다 이른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 중엽부터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부처님을 의미하는 상징물을 숭배하고 공양하는 자세로 묘사되다가 이후 1세기 무렵이 되면 불상의 광배에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형태로 조성된다. 인도 비천상 가운데 하반신이 새와 같은 형상은 팔부중의 하나인 건달바 혹은 긴나라를 표현한 것으로 제석천의 악신(樂神)이었다. 이들은 미묘한 음성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보살과 중생을 감동시키는 음악의 신으로 흔히 주악비천이라고 부르는 비천형태의 원류에 속한다.

고대 인도신화에서 유래한 불교수호신
역동적이며 율동성 강한 것이 큰 특징
무덤 주인 극락 이끄는 놀라운 미의식

과학적 사고에 중점을 두는 서양의 천사는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지만 동양적 사고에서 비천은 날개 없이 하늘을 난다. 간혹 1841년 그려진 대구 동화사 염불암 관경변상도처럼 날개가 그려진 비천이 있기도 하지만 고구려 시대부터 우리나라 비천은 날개가 없이 하늘을 날았다. 비천은 표대(飄帶) 혹은 박대(博帶)라 불리는 팔에 감긴 긴 띠, 즉 천의를 이용해 하늘을 날기 때문에 비천의 형상에 천의의 표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흔히 비천은 여성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인도 고대 조각에서는 남성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여성형의 비천은 시대가 내려오면서 서서히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천의 모습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을 수 있다. 5세기 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천 1호분 벽화에는 다양한 자세로 하늘을 나는 비천들이 있다. 화반을 들고 연화 공양하기도 하고 피리와 나팔, 오현금 등의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는 비천 가운데는 얼굴에 수염이 그려진 남성형 비천도 모습을 보인다. 천의는 바람에 날려 한껏 부풀어져 있으며 요가 자세처럼 다리는 머리에 닿을 듯하고 손에는 꽃을 담은 공양구를 들고 있는데 이들이 뿌린 듯 화면 가득 봉우리 진 연화가 흩어져 있다.

▲ 삼실총 주악비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상으로 평가받는 비천상은 안악2호분 벽화에 그려진 비천이다. 비천은 하늘을 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대부분 고분의 묘실 천정부에 그려지지만 안악 2호분의 비천은 묘실 벽면의 상부에 있다. 묘실벽화에 주인공으로 그려진 인물이 여성이고 시신을 두는 관대가 하나만 있어 무덤의 주인공은 여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인지 이 무덤 벽면에 그려진 비천은 남성은 없고 모두 여성형으로만 채워져 있다. 묘실 동벽에 그려진 여성형의 비천은 수평비행 형태로 두 손에는 연꽃이 담긴 화반을 들고 후방에는 신체보다 더 기다란 날개옷이 물결에 흔들리는 해초와 같이 흔들리고 있으며 화반에서 뻗어나간 줄기 끝에는 연꽃봉우리가 바람에 날린다. 뒤를 이어 또 한 구의 비천이 같은 형태로 연꽃화반을 들고 비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꽃을 공양하는 모습을 그린 모양이다. 세월의 흔적으로 모습이 많이 희미해져 있지만 머리에 보관을 쓴 고운 자태로 반달 같은 눈썹에 오뚝한 콧날, 갸름한 눈매는 소리 없이 눈으로만 웃고 입가는 잔잔한 미소를 띠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우리나라 전통 미인의 형상이다. 날렵한 몸매로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공간을 날며 꽃을 뿌려 장엄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은 지금 보아도 부드럽고 우아하여 세련미가 있다.

크기가 비슷한 방이 세 개 있어 삼실총이라 불리는 무덤에는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완함(阮咸)을 연주하는 주악비천이 있다. 완함은 ‘악학궤범’에 의하면 둥근 몸통에 긴 목을 지녔고 네 줄로 구성되었다고 하는데 벽화의 완함형태도 그와 유사하다. 월금이라고도 불리는 완함은 고구려에서 독주 악기 혹은 거문고, 퉁수와 함께 반주악기로 쓰였다고 추정된다. 그런데 그림에서 편안하게 바닥에 앉아서 다리를 뻗고 연주하는 모습은 반주보다는 독주하는 형상에 더 가깝다. 벽화를 그린 작가는 단 한 번의 붓질로 형상을 그려낸 듯 인물을 표현한 선들은 속도감과 생동감이 넘쳐난다. 머리의 상투는 열정적인 연주에 못 이겨 앞으로 쏠려 있고 고개를 숙여 현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자신의 연주에 심취된 듯 그윽하고 깊다. 바람에 천의를 날리며 왼손으로 완함의 현을 쥐고 오른 손으로 퉁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천상의 대가가 연주하는 완함의 소리가 은은히 창공에서 들릴 것 같다.

▲ 오회분 4호묘 널방 북쪽 천장고임 주악비천상.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상의를 입지 않고 천의만을 걸친 인도식 비천 이외에도 도교 신선과 같이 도포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비천도 있다. 중국으로 전래된 인도의 비천이 남북조 시대를 지나며 중국 문화에 영향을 받아 도교의 선인과 융합이 되면서 이런 모습의 비천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상의를 탈의하고 있는 비천상은 모두 천의를 날리며 창공을 날지만 선인 모습의 비천상은 신선과 선녀가 봉황과 난새를 타고 날듯이 성스러운 동물을 이용해 창공을 비행하기도 한다.

다섯 개의 고분이 밀집해 있어 오괴분으로도 불리는 오회분의 벽화에는 신선과 같은 모습으로 주악비천이 그려져 있다. 오회분 4호묘 널방에는 구름 위에서 천의를 휘날리며 두 손을 벌려 허리에 매고 북을 연주하는 남성형 비천상을 중심으로 하여 피리를 부는 형상과 거문고를 타는 형상으로 북쪽 천정의 고임돌에 3구의 주악비천이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탈 것이 아닌 천으로만 공중을 날고 있지만 군의라 불리는 바지만 착용한 인도식 비천이 아니라 도포와 같은 한족복장을 하고 있어 인도식 비천에 신선의 모습이 융화된 중국식 비천이라고 할 수 있다.

▲ 오회분 5호묘 널방 천장고임의 주악비천상.

5호묘에서 탈것을 이용해 나는 주악비천은 도포의 끝자락이 새의 깃털과 같이 그려진 우의(羽衣)를 입고 있는 신선과는 달리 천의를 날리는 모습이다. 머리를 힘껏 위로 제치고 두 다리를 앞으로 뻗은 용은 생동감과 위력이 넘치고 그 위에 올라앉은 비천의 상투와 천의는 꺾어 질 듯 휘날리고 있어 비행의 속도감이 생생히 느껴진다. 용은 금방이라도 화면을 뚫고 하늘을 날듯 격동적이지만 그 위에 앉아 배소(排簫)와 나팔을 불고 있는 비천은 안정된 자세로 연주에 심취된 듯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힘차고 역동적이며 율동성이 강하다는 고구려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면서 천상의 음을 전하는 비천의 모습은 고요하고 기품이 있어 하나의 화면에서 보이는 동세가 다양함을 보인다.

우리나라 비천상 가운데 고구려 고분벽화처럼 죽음의 공간에 비천이 조성된 예는 흔치 않다. 우리네 선조님들은 고분의 벽면에 불보살님을 공양하고 찬탄하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생동감 있는 비천상을 그려 어둡고 추운 망자의 공간을 천상의 음악이 흐르고 꽃비가 날리는 불국토로 바꾸었고 그 공간에 머무는 묘주를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놀라운 미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진희 문화재청 감정위원 jini5448@hanmail.net
 

[1401호 / 2017년 7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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