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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긍정의 힘이란

기사승인 2017.07.31  13: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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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친구는 내게 희망의 그림을 그려주었소”

   
▲ 그림=근호

야전병원에 두 병사가 한 병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중상을 입은 상태여서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한 채로 한 병사는 창가에, 다른 병사는 안 쪽에 누워 있었다.

야전병원 함께 입원한 두 병사
창가 병사는 늘 중상 병사에게
풍경과 희망 중계 하듯이 설명
큰 감동 받고 재활 통해 새 삶


둘 간에는 차이가 있었다. 창가에 누워 있는 병사에 비해 안쪽에 누워 있는 병사의 정신력이 약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는 팔다리를 잃은 자신의 처지에 크게 절망에 빠진 나머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그 때문에 나날이 기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안쪽의 병사가 창가의 병사에게 심심하고 지루하니 창밖의 풍경이 어떤지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창가에 누워 있는 병사는 창 밖의 풍경을 스포츠 경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처럼 전해주었다.

“저기 장미꽃이 활짝 피어 있군! 그리고 그 옆으로 회복기에 접어든 환자가 휠체어를 타고 나와 앉아 장미꽃 향기를 맡고 있어. 게다가 하늘은 어찌나 맑은지!”
“저런! 저렇게 우아한 여인이 있나? 모나리자가 그림 밖으로 나온다고 해도 저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을 거야. 그런데 그 여인이 환자를 돌보고 있네그려. 그녀는 아마도 환자의 아내인 것 같아.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귀여운 딸은 린네르로 된 옷을 입고 잔디밭에서 사슴처럼 팔짝팔짝 뛰는군.”

그러던 어느 날 창가의 병사가 말했다.

“아니, 이럴 수가! 저 사람은 전에 팔다리가 모두 없었던 사람인데, 어찌된 거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팔다리가 없던 저 사람이 팔다리를 자유자재로 쓰니까 하는 말이 아닌가? 참 놀랍군! 놀라워! 저 사람은 무슨 특별한 방법으로 의수와 의족을 해 단 모양이야!”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단 얘기잖아?”

하고 안쪽에 누워 있는 병사가 외쳤다.

“그렇고 말고! 우리 병원에서는 아직 그런 수술을 받은 사람이 없지만 머지않아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겠지!”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안쪽의 병사는 식욕을 되찾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창가의 병사가 갑자기 신열이 나더니 끙끙 앓기 시작했다. 그 병사는 그 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는데, 죽을 때 그는 안쪽의 병사에게 말했다.

“지금이 내 운명을 받아들일 때야. 마지막으로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뭐든지 들어줄 테니 어서 말해보게.”
“내가 자네를 위해 기울인 노력을 기억해 주게. 그러면 나는 죽더라도 죽는 게 아냐.”

안쪽의 병사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물었지만 창가의 병사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두었다.

날이 밝자 간호병은 죽은 병사의 시신을 밖으로 꺼낸 다음 안쪽 병사의 병상을 창가로 옮겨주었다. 그동안 친구의 말을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었던 갖가지 풍경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되는, 그것은 그 병사가 그동안 열렬히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그렇지만 창밖으로 눈을 돌린 그에게 보이는 풍경은 그의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싸늘한 시멘트 벽과 바닥뿐, 거기에는 장미도, 부인도, 의수와 의족을 단 환자도 없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창가의 병사가 친구에게 긍정적인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그동안 상상의 이야기를 해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큰 감동을 받은 창가의 병사는 그날부터 재활 치료에 전념했다. 다음 해에는 의수와 의족을 다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다시 몇 년이 지났을 때, 이미 퇴원하여 의수, 의족을 능숙하게 사용하게 된 그는 자신이 역경을 이겨낸 내용을 책으로 써내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얼마 뒤에 그는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둘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 아내는 그를 진심으로부터 사랑해주었고, 딸 또한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어느 때 그의 아내가 어떻게 고통스러운 환자 생활을 견뎌냈느냐고 묻자 그가 말하는 것이었다.

“긍정의 힘으로, 그리고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써! 그 친구는 내 마음에 긍정의 그림을 그려주었고, 그 그림은 나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었소. 나는 그 그림을 상상의 화면 위에 밤낮없이 그리고 또 그렸다오. 처음엔 단순한 선화(線?)에 불과하던 그 그림은 아름다운 집, 아름다운 정원, 아름다운 가족으로 점점 더 풍부해지면서 수채화가 되고 유화가 되었소. 처음엔 무채색이던 그 그림이 유채색이 되고, 처음엔 추상화 같던 그 그림이 구상화가 되어 또렷하고 분명해졌던 거요. 그리고 지금, 그 그림은 현실이 되어 내 앞에 있는 게 아니겠소?”

불교는 인간을 물질(色:색)·느낌(受:수)·표상(想:상)·의지(行:행)·인식(識:식)으로 분석한다. 이중 표상으로 풀이된 상의 빨리어는 산냐(saññā)이며, 산냐는 모습·모양을 뜻하는 니밋따(nimmitta)와 함께 ‘금강경’에서 상(相)으로 번역되어 있다.

불교가 인간을 이렇듯 다섯 무더기(五蘊:오온)로 분석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왜 ‘나’가 없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삶의 모든 문제가 ‘나’라는 기초 위에 얹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이 나라고 여기는 오온은 텅 비었다고(五蘊皆空:오온개공) 관찰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교리가 심신(오온)을 없애라거나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비우면 족할 뿐이다. 심신은 없앨 수 있는 것도, 무시할 만한 것도 아니다. 심신을 없애려면 자살을 해야만 하고, 무시하려면 몸을 움직이지도, 무엇을 인식, 표상하지도, 느끼지도, 의지를 일으키지도 말아야 할 것이지만 불교는 그것을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교는 오온을 선용하라고 권한다. 산냐가 작동하면 대상에 대한 그림이 떠오르게 된다. 이 기능을 잘 이용함으로써 불교인은 삼매에 드는 등 수행 경지를 이룰 수 있다. 예를 들어 관상염불(觀像念佛)은 부처님에 대한 산냐를 적극적으로 일으키는 수행법이다.

일화에 나오는 창가의 병사는 안쪽에 있는 병사의 마음에 긍정과 희망의 산냐를 형성시켰고, 그럼으로써 안쪽에 있는 병사는 삶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다만 불제자인 우리는 그 다음까지도 생각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금강경’의 진수로 들어가 모든 산냐가 꿈같고, 헛것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 나아감으로써 대해탈을 이루어야만 하는 것이다.

김정빈 소설가·목포과학대교수
jeongbin22@hanmail.net
 

[1402호 / 2017년 8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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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빈 교수 jeongbin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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