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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괘방산 안인항-삼우봉-등명낙가사

기사승인 2017.07.31  13: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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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바다 누르고 선 절에서 해탈한 풀꽃에 반하다

   
▲ 등명낙가사 가는 길은 산 위 바닷길로 불리는 ‘바우길 8구간’이다. 단언컨대 삼우봉서 마주한 풍광이 최고다.

어느 날 문득, ‘변함없는 나의 삶이 지겹다고 느껴질 때, 자꾸 헛돌고만 있다고 느껴질 때, 지난 날 잡지 못했던 기회들이 나를 괴롭힐 때’ 여행을 떠난다면 어디로 갈까? 아티스트 김창기씨는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을 사겠다고 한다.

조선 제일풍광 정평 강릉
산 위 바닷길 ‘바우길’서
녹색향연 속 절 만나 ‘쉼표’


등명대서 마주한 바다 보며
붉은 빛 부서지는 일출 상상
탑 옆 풀꽃 ‘존재 이유’ 설법


‘거리에서’를 만들고 노래했던 동물원의 김창기씨, 문화방송 대학가요제 대상 곡 ‘꿈의 대화’를 노래했던 이범용씨는 그룹 ‘창고’를 결성(1997) 하고는 앨범 ‘날 기억하는지’(1999)를 내놓았다. 앨범 수록 곡 중 김창기씨가 작사·작곡하고 이범용씨는 노래한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장을 살게’에서는 표 한 장 값으로 결국 술 한 병을 사는 도시인의 고독이 느껴진다. 하여, 오늘은 그 고독 철저히 뒤로한 채 술 한 병 값으로 결국 표 한 장을 사 ‘창고’의 권유대로 강릉으로 떠난다.

‘언젠가 함께 찾았었던 그 바다를 바라볼 때, 기쁨이 우리의 친한 친구였을 때, 우리를 취하게 하던 그 희망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을 살게!’

   
▲ 안인항서 떠난 ‘바다열차’가 정동진역으로 향하고 있다.

차향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한송정, 경포호수의 경포대를 품은 여기는 그 옛날 예맥족이 살던 땅. 고구려 세력 아래서는 ‘하슬라(河瑟羅)’, 신라의 발길이 닿았을 때는 명주(溟州)로 불리다가, 고려 때 강릉(江陵)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려 공양왕 때는 지금의 지방행정기관이라 할 수 있는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별호로 임영·臨瀛)도 있어 북으로는 원산, 남으로는 울진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를 관할했다.

조선의 서거정(徐居正)이 ‘우리나라의 훌륭한 경치는 관동이 첫째이고, 관동에서도 강릉이 제일’이라고 했을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이 땅에서, 김부식(金富軾)의 아들로도 유명한 김돈시(金敦時, 1120~1170)의 시 ‘등명사(燈明寺)’를 따라 정동진역 옆 괘방산으로 간다.

‘푸른 바다를 누르고 선 절이 멀리 아득한데/ 올라 보니 바다 한가운데 있는 듯하네/ 발(簾)을 걷으니 대(竹) 그림자는 성긴 듯 빽빽하고/ 베개에 기대니 파도소리 낮았다가 또 높아지네….’(박도식 선생 역)

   
▲ 이 돌길을 지나 조금만 더 오르면 삼우봉에 닿는다.

푸른 바다를 누르고 있다 하니 바다가 보이는 절이요, 잠자리 들 때면 ‘처얼∼썩’ 파도소리도 들린다 하니 해안과 가까이 한 산사인 게 분명하다. 등명사는 지금의 ‘등명낙가사(燈明洛伽寺)’를 이른다.

전언에 따르면 등명사(燈明寺)는 신라 때 창건했다고 하는데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건 아니다. ‘등명낙가사 5층석탑’이 고려 때 조성된 탑이고, 김돈시가 고려 중기의 문신이므로 고려 때 존재했던 절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신라 창건을 입증할만한 학술적 흔적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월정사 적멸보궁을 조성했던 즈음의 650년 전후일 것이다. 한때, 등명사가 ‘삼국유사’ 속 ‘수다사’였다는 설이 있었지만, 수다사 터는 진부에서 확인됐다. 다만, 도량 한편에 남아 있는 파손된 옛 석탑 부재가 신라 말 때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통일신라 말 창건 가능성은 남아 있다. 

강릉부사 맹지대가 편찬(1788)한 강릉의 읍지인 ‘임영지(臨瀛誌)’에 ‘등명’이라 한 연유를 이렇게 밝혀 놓았다. ‘등명의 뜻은 강릉대도호부 안에서 마치 어두운 방 안에 밝은 등이 있는 것과 같다.’ 바닷가 한적한 절에서 나오는 등빛을 두고 이른 말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는 조선후기 유학자의 시각일 뿐이다. 고려를 넘어 신라 말 자장율사 창건까지 바라보는 고찰이 품을 만한 유래설이 아니다.

등명(燈明)! 부처님 전에 올리는 촛불이나 등잔불, 석탑 안에 켜 놓은 전등 일체를 등명이라 하여 ‘부처님 법을 펴는 일’, ‘불조의 혜명을 잇는 일’ 등을 상징한다. 이 절을 처음 일으킨 누군가는 적어도 ‘무명(無名) 속에서 길 헤매는 중생의 앞길을 비춰주는 절’이라는 의미를 담아 ‘등명사’라 했을 것이다.

   
▲ 등명낙가사 5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재 37호).

산은 그 누구에게라도 길을 허락하려는 듯 험하지 않았다. 그러나 34도의 폭염이 몇 걸음 떼지도 못한 나그네를 주저앉히고야 만다. 산에 이는 바람마저 중천에 뜬 해가 뜨겁게 달구니 나무 그늘도 신통치 않다. 그래도 나그네를 일으켜 세워 걸음하게 하는 건 산과 바다가 시시각각 빚어 내놓는 풍광이다. 왼쪽으로는 여름이 담긴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진녹색의 산이 켜켜이 뻗어 있다. ‘산 위에 바닷길 있다’더니 헛말이 아니었다. 활공장 전망대서 본 경치도 좋지만 단언컨대 삼우봉서 바라 본 경치가 최고다. 서거정도 괘방산을 올랐을까?   

예로부터 절은 나그네들의 쉼터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아울러 공부하는 사람에게 도 머물만한 작은 공간 하나 내어 주기도 했다. 유생들은 등명사에서 공부하다 깊은 밤중(삼경. 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산에 올라 급제기도를 올리곤 했다. 효험이 있었던 것일까? 절에서 한겨울, 또는 몇 해를 난 유생들에게 벼슬길이 열렸다. 과거를 패스하면 이 산 어딘가에 급제자의 이름을 쓴 방을 붙여 고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했다고 한다. 고시 패스를 축하하는 현수막을 건 셈이다. 하여, 언젠가부터 산 이름이 괘방산(掛榜山)으로 불렸다.
등명사를 연구한 박도식 선생은 1759년 편찬된 ‘여지도서’의 ‘지금은 폐사되었다’는 등명사 기록을 고려해 1759년 이전에 대형 산불 화재로 절은 폐사 지경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현종실록’에 따르면 1672년 4월 강릉지역에 대형 산불이 발생 해 민가 1900여호가 불탔고, 우계창의 곡물과 군기 등의 물건이 한꺼번에 타버렸으며, 화마에 생을 달리한 사람만도 65명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강릉 옥계면 일대에 설치됐던 창고 우계창(羽溪倉)과 등명사와의 거리는 약 8km. 박도식 선생의 논거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박 선생은 또한 1804년 3월 또 다시 대형 산불이 나 송담서원이 불타고 61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이 담긴 ‘범우고’를 고려해 동명사는 이때 완전히 폐허로 남게 됐다고 보고 있다. 이후 경덕(景德) 스님이 1000일 관음기도 후 1956년 절을 다시 세우며 관세음보살이 머문다는 보타낙가산을 착안 한 ‘낙가사’와 옛 절 이름 ‘등명사’를 합쳐 ‘등명낙가사’로 했다.

   
▲ 등명루에 들어섰다면 만월보전 앞 5층석탑과 눈을 맞춰 보시라!

만월보전 앞 등명낙가사 5층석탑은 한여름 짙은 녹색의 향연 속에 다소곳이 홀로 서 있었다. 저 탑 온전히 감상하려면 ‘등명루’라 불리는 누각에 들어서야 한다. 그 옛날에도 이 자리에 누각이 있었을까? 안축(安軸. 1282~1248)은 안변, 통천, 고성, 간성, 양양, 강릉, 삼척, 울진, 평해, 정선 등 관동지방의 8경을 노래했다. 바로 관동별곡(關東別曲)이다. 그는 강릉을 이렇게 바라보았다.

‘삼한의 예의와 천고의 풍류를 간직한 임영의 옛 고을/ 경포대와 한송정은 달이 밝고 바람이 맑은데/ 해당화 핀 길과 연꽃 핀 못의 봄가을 좋은 시절에/ 아, 노닐며 구경하는 광경 어떠합니까?/ 등명사 누대 위에서 오경의 종이 울린 뒤에/ 아, 해돋는 광경 어떠합니까?’

누각에서 맞이하는 일출 오늘은 놓쳤지만 이승휴(1224~1300)의 시에 기대 상상도를 그려본다. 고려 중기 문신이었던 그는 누각에 걸린 시들을 보고 감흥이 일어 ‘차등명사판상운(次燈明寺板上韻)’을 지었다.

‘좋아라 금자라산은 옥봉을 머리에 이었고/ 힘차게 솟는 푸른 파도 공중에서 부서지네/ 학처럼 수척해진 스님은 품격을 자랑하고/ 드러난 하늘은 땅의 공교로움을 뽐내노라/ 닭도 울지 않은 새벽 누대에는 해가 뜨고/ 신기루 일어나는 이곳 해룡은 불어대노라/ 탑대(塔臺)는 기이한 정취 서로가 알 듯도 같아/ 아침 해 기다리니 만 가지 붉음 드러나노라’ (장정룡 선생 역)

누대서 바라보는 일출 너무도 장엄했나 보다. 아침 햇살에 붉어지는 파도 또한 환상적이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만 가지 붉음’이라 노래할까! 누각에 서 동해를 바라보다 뒤돌아 벤치에 앉아 만월보전 앞 ‘등명낙가사 5층석탑’과 마주했다. 탑 곁에 풀꽃 하나 피어 있다.

‘풀꽃 한 송이 흔들린다./ 그는 세태의 탐욕도 시기도 질투도 영욕도/ 다 벗어두고 순수 알 몸/ 다만 존재의 모습으로 피어있다. / 세속의 때도 벗고/ 위선의 말도 버리고/ 순수 영혼 그 본연의 리듬에 몸을 풀고/ 작은 하늘을 열었다./ 형용사를 버리는 늙은 시인처럼/ 화장기 없는 맨 얼굴로/ 생명의 깃발을 나직이 울렸다./ 오늘 그는 몸을 줄이고 줄이고/ 언제나 낮은 데로 임하는 물소리처럼/ 완성의 문을 두드려 해탈의 뜨락으로/ 하얀 맨발을 성큼 들이 밀었다.’ (박명자 시 ‘풀꽃 한 송이’)

오늘은 그냥 이렇게 누각에 한없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등명낙가사의 역사적 변천과 위상에 대한 조명’(강릉문화원) p9∼p46 ‘등명낙가사의 역사적 내력 연구’(박도식), p55∼p91 ‘강릉 등명낙가사의 사찰연기설화 고찰’(장정룡).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안인삼거리 무료주차장. ‘강릉 바우길 8구간’ 초입이며 해파랑길 36구간이기도 하다. 괘방산(345m) 아래 삼우봉까지의 2.9km 구간이 오르막이지만 경사는 비교적 완만하다. 한여름에는 2시간 잡고 쉬엄쉬엄 올라야 한다. 활공장 전망대와 삼우봉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 일품이니 만끽하기를 권한다. 삼우봉을 지나면 바다 풍경은 사라진다. 삼우봉에서 1km정도 하산하다 나무계단을 내려오면 포장도로와 만난다. 이정표를 마주하고 좌측으로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등명낙가사에 이른다. 길을 자칫 잘못 들면 정동진으로 향하게 된다. 총 5.7km. 2시간40분.

[1402호 / 2017년 8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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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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