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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마음을 쉬고, 또 쉬어라

기사승인 2017.08.14  17: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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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고기 잡았으면 통발은 버려야

원문: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알지 못할까 염려되어 방편으로 ‘도’라는 이름을 세웠을 뿐이다. 그러니 이름에 갇혀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을 잊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도에 요달해 깨달아야 한다. 이렇게 근원자리에 통달한 사람을 사문이라고 부른다. 사문의 수행은 사려(思慮)를 쉼으로 해서 이뤄지는 것이지, 배우는 것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지금 마음을 갖고 마음을 구하는 것과 같다. 옆집에 머물러 배움을 헤아려 구하려 하니, 어느 시절에 도를 얻겠는가?

성문·연각·보살이 다 방편
근기에 맞춰 설한 것일 뿐
진리 얻었다는 것도 집착
알음알이를 내지 말아야


이전까지 갖고 있던 모든 알음알이를 다 비워서 다시 분별함이 없다면 곧 이것이 공여래장이다. 여래장에는 다시 한점 번뇌의 티끌도 없나니, 이것이 유법(有法)을 파하는 왕이 세간에 출현하신 까닭이다. 또한 경에서 ‘내가 연등불 처소에서 얻은 법이 없다’라고 했으니, 이 말은 사람들에게 ‘정량과 지해를 비우라’는 뜻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만 지해가 안팎으로 녹아 없어지고, 번뇌가 다하여 의지하거나 집착이 없는 사람을 ‘무사인’이라고 부른다. (성문ㆍ연각ㆍ보살) 삼승교의 체계는 단지 근기에 응한 약으로, 마땅함을 따라 설한 것이다. 임시로 시설한 것이므로 제각기 다르다. 다만 요달해 깨닫는다면 곧 미혹의 피해를 입지 않는다. 제일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각 근기에 맞춰 설한 것이므로 문구에 알음알이를 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래는 ‘실로 일정한 법이 없는 것’을 설하였다. 우리 선종문에서는 이런 (방편)일을 거론하지 않는다. 다만 마음을 쉬고, 곧 쉬어야 하는 것이요, 다시 전후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해설: 원문에서 ‘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을 잊어야 한다’는 부분을 보자. 부처님의 진리는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므로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 방편을 버려야 한다. 마치 고기를 잡기 위해 통발을 이용하는데, 고기가 잡혔다면 통발은 버려야 하는 것과 같다. 언어란 깨달음을 상징하고 표현하는데 하나의 도구일 뿐, 그 언어가 깨달음을 대변할 수는 없다. 그래서 ‘능가경’에서는 ‘무릇 언설에는 진실한 뜻이 없다’고 하였고, ‘반야경’에서는 ‘설할 만한 법이 없는 것을 설법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선학이나 그 이론은 아포리즘(apriorism)에 불과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가섭에게 꽃을 들어 보였다. 덕산 선감(782~865)은 깨달음을 묻는 제자들에게 방망이[棒]를 휘둘렀으며, 임제(?~867)는 소리[喝]를 질렀고, 구지 선사는 손가락을 들어 보인[一指禪] 경우는 언어가 아닌 방편으로 제자들을 인도하기 위함이다. 이 또한 근원자리로 안내하기 위해 그때그때 활용한 것에 불과하다.  

원문에서 ‘사문’이라는 호칭에 대해 살펴보자. 부처님 당시, 사문은 불교의 수행자만을 지칭하던 것이 아닌 바라문에 반하는 혁신적인 수행자 집단을 말했는데, 불교에서 그대로 수용하여 비구를 뜻하는 단어로 쓰고 있다.

공여래장이란 ‘승만경’에서 언급하고 있다. 번뇌가 전혀 없고, 차별이 끊어진 순수한 본성이다. 진공과 묘유 측면으로 본다면, 공여래장은 진공(眞空)에 해당한다.

원문에서 ‘유법(有法)을 파하는 왕이 세간에 출현하신 까닭’은 ‘법화경 약초유품’의 게송이다. 여기서 ‘유(有)’는 세계를 호칭하는 것으로 번뇌에 가득 찬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이다. 곧 부처의 출현은 중생들에게 번뇌가 있으니, 이를 없애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출현한 것이다. 

원문의 ‘내가 연등불 처소에서 얻은 법이 없다’는 ‘금강경’ 10품에 언급된 내용이다. 연등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과거 스승이다. 부처님은 과거세에 어떤 진리가 있어서 특별히 얻은 것이 아니다. 설령 진리가 있다고 해도 ‘진리를 얻었다’는 관념이나 집착이 없다. 이와 같이 어떤 것에 의지하거나 관념두지 않는, 불성의 근원자리에 입각해 있어 번뇌조차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일을 마친 범부’를 무사인이라고 호칭한다.

원문에서 ‘일정한 법이 없는 것’을 여래가 설하였다는 부분을 보자. 무유정법은 ‘금강경’ 7품에 언급된 내용이다. 곧 최고의 진리라고 하지만, 어떤 단정적인 법이 없다. 어떤 것이 최고의 진리라고 정의한다면, 이 또한 알음알이이기 때문이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403호 / 2017년 8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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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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