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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와 오직 하나만 아는 바보-하

모든 것 붕괴되는 그곳서 바보와 백치 조우

▲ ‘북을 칠 줄 안다’고윤숙 화가

이탈로 칼비노의 작품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백치와 바보에 대한 탁월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백치’를 다루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백치를 발견할 수 있다. 구르둘루라고도 불리고 오모보, 마르틴줄, 구디-우수프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그는 오리를 보면 자신이 오리라고 믿고 오리처럼 행동하고, 개구리를 만나면 개구리, 배나무 옆에서 배나무, 물고기를 만나면 물고기가 되는 인물이다. 그를 보고 황제가 말한다. “내가 보기엔 자기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는 것 같군.”(‘존재하지 않는 기사’, 민음사, 36) 하는 짓이 보는 이를 웃도록 만들고, 그래서 언제나 놀림감이 되는 인물이니, 정말 백치라는 말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그가 많은 이름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계절에 따라서 다른 이름을 가지며, 만나는 이마다 다른 이름을 갖는 것이다. “어떤 이름이든 그에게 달라붙어 있지 않고 흘러가 버린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부르든 그에게는 별 차이가 없는 겁니다.”(38)

‘모른다’며 접근 할 때 백치가 된다면
오직 하나로 돌파할 때 바보가 된다
모른다와 하나만 아는 것 같은 의미

구루둘루가 “존재하지만 자기가 존재하는 줄 모르는 사람”(37)이고, 존재자의 고정된 규정성을 갖지 않기에 어떤 존재자도 될 수 있는 ‘존재’, 어느 하나로 명명할 수 없는 ‘존재’라면,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존재하지 않지만 자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기사다. 그는 희고 깨끗한, 어떤 전투를 해도 전혀 더럽혀지지 않는 갑옷을 입고, 정해진 규칙이나 규정에 대단히 엄격하며 사람들이 그것을 준수하는지 확인하고 다닌다. 활을 쏘아도 신경이나 근육을 사용하지 않는 듯한, 그러나 정교한 동작으로 과녁을 정확히 맞춘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를 연상하게 하는 이 인물은 구르둘르와 반대로 엄격한 규정성을 갖는 존재자, 그러나 존재하지 않기에 존재 없는 존재자인 셈이다. 규정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존재자, 갑옷에 갇힌 존재자다. 아니 갑옷으로만 ‘존재하는’ 존재자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참전한 젊은 기사 랭보는 이 두 인물 사이에 있다. 원수를 갚을 길을 찾는 그에게 아질울포는 알려준다. “결투관리부, 복수관리부, 명예회복관리부에 가서 자네가 요구하는 사항의 이유들을 분명히 밝히고 자문을 구하라.”(21) 규칙과 규정성의 갑옷만으로 존재하는 아질울포다운 대답이다. 찾아간 이들의 대답 또한 그렇다. “장군의 복수를 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소령 세 명을 죽이는 거다. 우리는 자네가 손쉽게 제거할 수 있는 적 세 명을 배당해 줄 수 있다. 그러면 만족하겠지?”(25) 극단적 관료를 상상하게 하는 그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관료, 존재 없는 존재자인 것이다. 규정만 있을 뿐 존재는 없는 존재자. 그는 이런 일반 규정이 아니라 자신의 부친, 자기라는 “오직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를 풀고자 한다(22). 랭보는 또 남자 이상의 기개를 가진 여기사 브라다만테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는 엄격한 규칙과 깨끗한 갑옷의 아질울포를 사랑한다. 요컨대 랭보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복수나 사랑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되지만, 바로 그 욕망으로 인해 주어진 조건이나 규정을 벗어나는 자다. 규정성에 충실하려 하지만, 그로 인해 규정성을 넘어서게 되는 자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아가는 자다.

구르둘루가 앞서 말한 백치라는 말에 정확히 부합한다면, 랭보는 바보라는 말에 어느 정도 부합한다. 랭보는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군대의 규정들을 벗어나 원수를 찾아 돌격하고 사랑을 얻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규정을 넘어서(속일 의도는 아니었지만 아질울포의 갑옷을 입고 브라다만테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사랑을 얻고자 한다. 구르둘루가 텅 비어있는 머리로 다가오는 모든 것을 담아내는 백치라면, 랭보는 머리 속에 오직 하나밖에 없어서 그것을 위해 모든 규정을 넘어서는 바보인 것이다.

선승들이 ‘모른다’면서 텅 빈 진제로부터 접근할 때 백치가 된다면, 반대로 정해진 것, 제약된 것의 속제로부터 접근할 때 우리는 거기서 바보를 보게 된다. 화산(禾山)의 ‘북을 칠 줄 안다’는 공안이 그렇다. 화산이 익히고 배우는 것과 더 배울 것 없는 것을 모두 넘어설(過) 때 그것을 진정한 넘어섬(眞過)이라 한다고 설법을 하자 어느 스님이 나와서 다시 묻는다.

“진정한 넘어섬이란 무엇입니까?”
“북을 칠 줄 안다(解打鼓).”
“무엇이 참된 진리(眞諦)입니까?”
“북을 칠 줄 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건 묻지 않겠습니다만,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북을 칠 줄 안다.”
“향상인(向上人)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북을 칠 줄 안다.”

왜 화산은 ‘북을 칠 줄 안다’고 했을까? 모를 일이다. 왜 하필 북인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화산은 여러 가지 물음에 같은 말로 답했지만, 조주는 여러 종류의 학인에게 ‘차 한 잔 하거라’라는 하나의 말로 응대한 바 있다. 거기서 ‘차’가 도의 상징이라고 해석하여 차가 왜 도와 비슷한지를 설명하려 하면, 조주가 그 말로 하고자 했던 것을 놓치고 엄한 길로 가게 된다. 여기서도 그렇다. 다만 화산의 대답은 앞서 백치의 ‘모른다’와 반대로 ‘잘/안다(解)’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기억해두자.

화산은 어떤 걸 물어도 오직 하나 ‘북을 칠 줄 안다’고만 답한다. 마치 머릿속에 그거 하나만 들어있는 ‘바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데 그 문답은 ‘진정한 넘어섬’이 무엇인지를 설하는 자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북을 칠 줄 안다’는 게 넘어섬의 의미라는 말은 아닐 게다. 그보다는 그 말 하나로 진리나 향상에 대한 모든 물음을 넘어서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 말 하나로 진리에 대한 물음을 넘어서고 있음을, 그대 또한 그러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을 게다. 운문이 화산의 ‘북을 칠 줄 안다’나 조주의 ‘차 한 잔 하시게’나 모두 ‘향상’을 제창하는 것이었다고 한 것은 이런 의미 아니었을까?

바보가 영웅의 감응을 주는 것은 몰락할 것을 알면서도 ‘오직 하나’ 견지해야 할 것을 위해 그 몰락을 향해 나아갈 때다. 니체 또한 사람에게 사랑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몰락마저 긍정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라고 했다.

이때 몰락하는 자란 ‘넘어서는(uberwindene) 자’를 뜻한다. 넘어서는 자를 니체는 ‘초인(Ubermensch)’이라 했고, 선승들은 ‘향상인’이라고 했다. 향상인이란 넘어섬을 향해, 자신이 몰락하는 곳을 향해, 그리하여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것들이 붕괴되는 곳을 향해 갈 줄 아는 자다. 나라고 부를 것이 없어지는 곳을 향해, 어떤 규정도 없는 ‘존재 자체’를 향해. 아마도 거기서 바보는 백치와 만나게 될 것이다.

대수 법진(大隋法眞)의 유명한 공안에서 나는 이 영웅적인 바보의 모습을 본다. 어떤 스님이 대수에게 물었다.

“겁화(劫火)가 활활 타서 대천세계(大千世界)가 모두 무너지는데, ‘이것’도 따라서 무너집니까?”
“무너지느니라.”
“그렇다면 그걸 따라가겠습니다.”
“그걸 따라가거라."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04호 / 2017년 8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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