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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좀 안다고 으스대면 세상이 교화 되나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7.08.27 16:13
  • 수정 2017.08.27 17:45
  • 댓글 29

이성운 동방문화대학원대 학술연구교수가 8월27일 법보신문에 ‘형식 없는 불자의 삶’이라는 기고문을 보내왔다. 이성운 교수는 불교의례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불교의례 전문가다. 현재 불교의례문화연구소 연구실장 및 조계종 의례실무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불교의례학포럼도 주도하고 있다. 편집자

계율 지키려는 것이 불자다운 삶
지나친 음주·방탕한 괴기는 비불자
불교운동하고 뒤풀이 곡차는 기만
불자수 감소 스님 탓만 하지 말고
당장 합장·공양게송부터 일상화해야

불자들의 삶의 형식을 결정하는 기제는 무엇일까. 필자는 당연 '의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믿음도 강건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좋아하여, 평생을 포교하며 사시는 분들도 의외로 실제 삶의 형식에서는 비불자와 크게 다르지 않을 때를 적지 않게 보게 된다.

무슨 말인가. 비불자들이, 불자라고 하면 합장경례하고 절에 다니며, 불자를 규정하는 전부가 아니지만 '비육식 비음주 비흡연' 등을 실천한다고 떠올린다. 과연 그러한가. 재가불자 가운데 불교 예법의 한 형식인 합장이 몸에 배인 분들을 보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 학자 언론인 등 비교적 지식인 그룹에서는 더욱 그렇다.

불자들끼리 인사할 때나 공양 때에 합장하고 기도하는 장면을 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마음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마음만 깨치면 된다느니, 다 똑같다느니 하며, 오히려 그런 데 매이지 말라고까지 한다. 과연 그게 매이는 것일까. 불교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타종교에 대해 관대하다.

그러면서 마음만 통하면 깨치면 다 된다고 한다. 하나 그 같은 안이한 생각은, 불자의 자제들이 타종교인과 혼인하게 되면 타종교인을 개종하게 하는 것보다 불자들이 타종교로의 개종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된다. 속수무책이다. 젊은 세대에 불자수가 절대적으로 적다 보니 그럴 것이다. 종교 때문에 사랑[혼인]을 포기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면 방관하고 때로는 오히려 권유조차 한다. 종교가 뭐가 중요하냐, 잘 살면 됐지 하면서.

근래 불자수 감소에 대한 개탄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불교를 주도하는 그룹이 큰스님들이니 스님들 탓도 적지 않겠지만 그것이 스님들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불교가 좋아 불교를 믿고 불교를 포교하고자 서원한 재가포교사들은 헌신적으로 군부대 교도소 등지를 다니며 불법을 전한다. 참으로 존경스럽고 고마운 분들이다. 한데 그 방법을 보면 대개 법문이나 교리강의, 음식물 등 재물 보시 등이 주종을 이룬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체적인 추세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불교 교리를 일러주는 것이 포교의 전부는 결코 아닐 것이다. 왜인가. 관심만 있다면 불교교리를 알고 공부하는 것이 오늘날은 너무나 간단하고 쉽기 때문이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인터넷 검색만 하면 교리들이, 너무나 친절하게 안내되고 있고, 또 도처에 불교를 소개하는 책자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그냥 보기만 하면 되는 그런 세상이다. 해서 그런 것보다 불자로 사는 삶이 수승한 것이라는 것을, 가능하면 몸소 보여주고 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불자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자신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가족이나 주변의 다른 이들이 어떻게 불교에 대한 호감을 가지거나 감화를 받겠는가.

부모나 이웃들이 불교를 믿고 공부해서 나에게 좋은 점, 득이 되는 게 - 경제적이든 비경제적이든 - 뭐라도 있다면, 불교를 전하려는 이들을 따라 믿고 배우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배울 게 없다면 특별히 신심이 있는, 인연 있는 불자가 아닌 한, 비불자들이 불교를 좋아할 동인은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삶이 불자다운 삶인가. 별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첫째도 둘째도 불교 계율을 지키며 살고, 또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지 못했다면 늘 참회하고 반성해야 한다. 참회한다고 해도 그 형식이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내면적이어서는 안 된다. 내가 변해야 한다. 필자 또한 말로만 그칠 때가 많다. 내 생활이 변해야 한다. 그 일차적 형식의 첫째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겠다는 합장하는 마음으로 합장하는 것이다. 둘째는 가족이나 다른 이들에게 물질과 정신을 정성껏 나눠주고, 고운 말 부드러운 말 긍정적인 언어생활을 하며, 남에게 이로운 행동을 하고, 또 함께해주는 그런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곧 사섭법의 실천이어야 한다. 이 같은 삶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불교하는 분들 가운데는 도인이 너무 많다. 도인 행세를 하며, 다른 이를 교화하고 자신을 완성할 수 있을까. 과음[폭탄주]으로 불음주계를 파괴하고 도인인 척하는 자기기만의 망어로 타자를 교화할 수 있을까. 불자의 과음과 자기기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좋겠다. 가령 파지(把持)운동을 하거나 포살법회를 하고 뒤풀이로 곡차를 나누는 것이 멋인가, 자기기만인가.

불자만의 삶의 고유한 방식[합장 등]만을 고집하면 사회에서 불자들이 왕따 당하고 화합을 깨뜨리게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 과연 그것이 옳은 판단이고 이해일까. 다른 종교인들은 거의 다 자기들 방식으로 사회 속에서 기도를 한다. 불자들만 비종교인인 보통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한다. 무늬만으로는 불자임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렇게 산다면 무엇으로 그 같은 생활을 하는 이들을 ‘불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해서 공양할 때에 합장하고 기도하는 형식을 실천해야 한다. 지식인 불자나 스님들 중에는 기도하려고 하면 오히려 면박을 주거나 그런 데에 매이지 말라고 되레 타이르곤 한다. 지인 한 분은 스님과 공양할 때 자신은 합장하고 기도하고 공양을 했는데, 그 스님이 그냥 공양하는 것 보고 자신도 그 이후부터 마음속으로만 합장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형식 없는 내용은 무의미하고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하며, 형식은 내용에 의미를 부여하며 내용을 완성시켜 준다고 하였다. 공양 때나 스님뿐만 아니라 불자를 만났을 때 서로 합장하고 인사해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정체감을 되새겨야지, 큰소리나 치며 도인인 척하고 불교를 좀 안다고 으스대기만 해서는, 자신과 세상이 교화되지도 않고 세상에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다.

▲ 이성운 동방문화대학원대 학술연구교수
우선 당장 합장과 공양게송부터 일상화 했으면 좋겠다. 지나친 음주나, 도인인 척, 대인인 척 호탕하고 방탕한 괴기가, 과연 불자이고 진정한 대 선사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불자로 살지 않는다면 굳이 불교를 공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불교로 불자로 사는 방식이 바로 불교의 일상의례이다. 깨달은 척하며 좀 안다고 큰소리치는 이태백 같은 괴짜를 결코 불자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 본사 부처님이 그렇게 살았다는 단 한 줄의 기사라도 경전에 있는가.

깨달은 척하고 독한 술병이나 부여잡고 헛소리나 해대며 도인인 척하는, 불교를 좋아하는 불교인들을 보며, 의례와 형식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1405호 / 2017년 8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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