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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분별없는 윤리학, 차별 없는 존재론-상

기사승인 2017.09.19  10:2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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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택하지 말라’는 말 자체가 또 다른 간택

   
▲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고윤숙 화가

조주 스님이 대중에게 법문을 했다.

조주가 승찬의 ‘간택’ 부정했던 것은
논리적인 역설 뒤엎어버리려는 의도
말에 매이지 않고 실행하는 법 지도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을 하지 않으면 될 뿐이니라. 근근이 말하는 것이지만, 이 또한 간택이고 명백함이다. 노승은 명백함 속에 있지 않다. 그대들은 이를 보호하고 아끼려느냐?”

그러자 한 스님이 나서서 물었다.

“명백함 속에 있지 않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아낀다는 말입니까?”
“나도 모른다.”
“스님께서 모르신다면 무엇 때문에 명백함 속에도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까?”
“묻는 일 끝났으면 절 올리고 물러가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은 3조 승찬의 ‘신심명’에 나오는 문구다. 조주가 언급한 이후 이 말은 ‘간택’이란 말을 ‘분별’이란 말로 바꾸어 선가의 핵심 종지(宗旨)를 요약한 것으로 널리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서 조주의 설법은 3조의 말을 그냥 반복하는 게 아니다. 즉 ‘간택을 하지 마라’고 하지만, 동시에 그것 또한 간택이고 명백함을 가정하는 것이라며 부정한다. 그렇기에 자신은 그 명백 속에 있지 않다며, 즉 ‘간택하지 말라’는 말을 명백히 옳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며 한 발 물러선다. 그리곤 그대들 또한 이 말을 보호하고 아끼려 하겠느냐고 묻는다. 아니, 어쩌라는 것인가? 간택하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이리 복잡하고 난감하게 말하는 것은 그가 이 말이 갖는 논리적 난점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간택을 하지 마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간택이기에, 어떻게 해도 간택이 되는 궁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자기언급’을 통해 자기부정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내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라는 말과 매우 유사한 역설에 빠지게 된다(이를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라 한다. 이 문장이 참이라면 이 문장은 거짓말이 된다. 이 문장이 거짓말이라면 이 문장은 참이 된다. 이는 이 문장이 말하는 바가 문장 자신을 언급하기에 발생하는 역설이다).

이런 난점을 잘 알기에 조주는 순진하게 “간택하지 마라”고 하고 끝내는 대신, 그 말 또한 간택이라면서 자신은 그 말의 명백함을 가정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간택하지 말라는 말을 포기한 게 아니라, 그 말에 포함된 간택조차 벗어나는 방식으로 간택을 하지 않으려 함을 뜻하는 것이니, 그 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 말에 충실히 따르면 그 말을 어기는 게 되는 궁지를, 그 말에 따르지 않음으로써 그 말에 따르게 되는 역설로 뒤엎어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 멋진 설법인가!

이렇게 빠져나가지만 논리적으로 보자면 그 뒤에도 다시 난감한 역설이 기다리고 있다. 조주에게 묻는 스님이 이를 정확하게 포착했다. 조주는 스스로가 “간택하지 말라”는 말에서 벗어나는 언행을 통해 ‘간택하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 자신이 명백함 속에 있지 않다고 물러섰지만, 그렇게 명백하지 않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아끼고 한다는 말을 어찌 하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조주는 이것이 논리적인 언어로는 뱅뱅 맴돌 뿐 벗어날 수 없는 역설임을 잘 안다. 그래서 그렇게 내지르는 질문에 “나도 모른다”고 응수한다. 하지만 이때 ‘모른다’는 말은 이런 난점을 모른다는 말이 아니며, 저 물음에 대해 ‘모르겠다’고 하는 순진한 답도 아니다. 그것은 ‘명료하고 뚜렷하게’ 말할 수 있는 것 너머에 속한 문제, 논리적 논변이나 지식을 통해서 말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 것임을 뜻한다. 여기서 조주는 보이지 않게 비약한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 근저에 있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안다’나 명백함의 영역에서 그 밑에 있는 ‘모른다’ 내지 ‘무지’의 영역으로. 그렇기에 이는 “당신은 누구냐”의 양무제의 물음에 답했던 달마의 ‘모른다’와 인접해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물었던 스님은 이 ‘모른다’를 ‘안다’를 뜻하는 명백함과 대칭적인 것, 그것의 반대말로 이해했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논리적 역설이 발생한다. 명백하다거나 명백하지 않다거나 모두 ‘모른다’는 상태에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모르신다면 어떻게 명백함 속에 있지 않다”고 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날카로워 보이는 논리적 반문이지만, 이는 조주가 ‘모른다’고 했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안다’와 ‘모른다’, ‘명백하다’와 ‘명백하지 않다’라는 단순한 이항적 대립구도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게 ‘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여기서 더는 답할 것도, 더는 물을 것도 없다. 그렇기에 조주는 말한다. “묻는 일 끝났으면 절하고 물러가거라.” 사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조주가 한 말의 논리적 타당성이 아니라, 그 말로 가르치고자 했고, 그 말로 행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돌이켜보는 것이었다. 즉 조주는 할 말을 이미 다 한 것이다.

이런 난점은 연기의 개념을 밀고 올라가 ‘공’이란 개념을 제안했던 용수에게도 동일하게 있었다. 어떤 것에 대해서도 본성이 없이 ‘공’하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공하다’는 문장 자체로 되돌아와 그 문장의 의미를 ‘공한’ 것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모든 사물들의 자성은 그 어디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자성을 갖지 않는 그대의 바로 그 말은 결코 자성을 부정할 수 없다.”(‘회쟁론’§1, 경서원, 14쪽) 이 말에 대해 용수는 자신에게 어떤 주장도 없다고 한다(§29). 말 자체만으론 적이 당혹스럽지만, 아무 주장을 한 적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말에 자성이 없음을 인정하는 말일 것이다. 자신의 말이 자성을 갖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 논의가 파괴되는 건 아니라면서(§24, 136쪽), 우리는 일상적 [언어] 관습을 인정한 위에서 말할 수밖에 없음(§28)을 지적한다. 용수가 쓴 순서를 뒤집어 요약했는데, 앞서 했던 말(§24, 28)을 고려한다 해도 자신에게 어떤 주장도 없다는 말(§29)은 논쟁을 하는 용수의 곤혹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인도는 중국과 달리 논리적 논쟁의 전통이 강하기에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하는데, 논리적으로 말하려는 한 공에 대한 주장은 스스로를 무력화하는 역설을 피할 수 없다는 난점에 기인하는 것일 게다.

이를 안다면 3조 승찬의 문구에 포함된 논리적 역설을 알아보고 그것을 넘어서는 조주의 설법은 더욱더 놀라고 멋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마치 논리 속에 존재하는 심연을 일찍 앞서 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조주만이 그렇다 할 순 없다. 선승들은 모두 가장 근본적인 것, 가장 심오한 법은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말하자마자 어긋나버리게 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빌지 않고선 전할 수 없기에 빗나갈 것을 감수하고 또한 예상하며 말로 가르치고자 했다. 간택을 하지 말라는 말이 타당한 말이지만 조주가 그 말 또한 간택임을 지적한 것은, 말하자마자 어긋나버리는 이 근본적 사태를 알기에 한 말이다. 그런데 조주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말에서 어긋나는 방식으로 그 말을 실행하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말로 가르쳐지는 것을 배우면서 그 말에 매이지 않고 넘나들며 그 말로 가르치고자 했던 것을 실행하는 법을 알려준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08호 / 2017년 9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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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교수 solaris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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