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의 판전(板殿) 편액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의 유필이다. ‘빼어난 솜씨가 오히려 어리숙하게 보인다’는 뜻인 대교약졸이라는 찬사를 받는 문화재(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3-4호)로, 낙관에 쓰여진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 즉 ‘일흔 한 살의 과천 노인이 병중에 썼다’라는 부기(附記)는 죽기 3일 전이라고 전해온다. 당대 동양 최고의 학자이며 성리학 이론의 권위자로, 영광과 좌절의 세월을 두루 거친 대경세가가 죽는 순간까지 불교 경판조성 작업에 혼신을 다했다는 사실이 귀명정례말고 무슨 설명이
미국 출신의 성공회 선교사 엘리 바 랜디스(Eli Barr Landis, 1865~1898, 한국명 남득시)는 1890년 25세의 나이로 한국에 입국하여 1898년까지 인천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인천 내동에 성누가병원(St. Luke’s Hospital)을 개원하고 이곳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한편, 조선인을 대상으로 영어교육을 전개하기도 했다.무엇보다 그는 한국의 종교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유교, 불교, 무속, 동학 등 당시 한국에서 지배적인 종교에 대해 여러 편의 보고서를 남기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가 이방
[1709호 / 2023년 12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확성기가 없던 시절, 성악가의 능력 중 첫 번째는 ‘음량이 얼마나 크냐’였다. 때문에 클래식 성악가들은 마이크 없이 넓은 공간을 울리는 발성을 연마하였다. 서울에서 하는 재의식에는 스님 한 명이 독창으로 하는 범패가 많다. 여기에는 국가나 왕실이 재주가 되는 대형의식이 사라지고 일가(一家)의 요청으로 행해 온 배경이 있다. 확성기가 없던 시절 큰 도량에서 범패를 하는데 한 사람이 노래한다는 것은 음량적 측면에서 불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억불의 도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남지역은 지금도 대부분의 범패를 울력소리(합송)로 하고, 중국과
지난주 연재에서 ‘화엄경’에서 전하려는 중요한 메시지로 “오비로법계(悟毘盧法界), 수보현행(修普賢行)”을 뽑았다. 비로자나부처님의 원력으로 펼쳐지는 법계 ‘위에’ 또는 그 ‘속에’ 인과 연이 만나 펼쳐지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모습을 제대로 체험해가면서[悟], 그런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보살행을 실천하자는[修] 것이 ‘화엄경’ 구성작가의 의도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오(悟)’와 ‘수(修)’는 선후 관계가 아니고 상즉(相卽)의 관계이다.‘화엄경’ 구성작가는 ‘이세간품 제38’에서, 보살행 실천자들의 다양한 수행을 여섯 ‘단계’로 보여주
쓰기 전엔 도망가고 싶었지만, 쓰고 나면 행복했던 기억이 새롭다. 꼬박 2년 동안 ‘세상이 묻고, 불교가 말하다’라는 연재를 뒤돌아보면서 느끼는 작은 소회다. 불교를 향한 나름의 문제의식을 다른 사람의 논문을 읽고 요약하는 형식을 빌려 은근슬쩍 드러내고자 했던 시간이었다. 평소 하고 싶었던 말을 마음 놓고 하도록 내버려 둔 법보신문에 무한감사하는 마음이다. 더러 주제넘은 오지랖도 있었겠지만, 독자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여태껏 다룬 주제들을 보니 코로나바이러스, 전쟁 난민, 인공지능, 성(性), 동물살생, 사형제, 평등과 권리
사천왕의 얼굴은 미묘하다 하기 어렵다. ‘분노존’이란 말처럼 어리석은 중생이나 못된 악귀들에 대해 분명하게 분노를 표시하는 얼굴이다. 사천왕상 중 가장 험한 표정을 하고 있다고 보이는 수덕사 사천왕을 보아도 그렇다. 지국천왕은 각이 지도록 부릅뜬 험한 눈으로 입을 크게 벌려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러나 씰룩 솟은 볼 주위의 울룩불룩한 얼굴의 리듬감을 따라 분노는 춤추듯 옆으로 새어나간다. 다문천왕은 눈을 부릅뜨고 속이 다 보이도록 입을 크게 벌려 고함을 지르고 있는데, 그게 너무 지나쳐 오히려 ‘나 무섭지?’라는 듯한 장난기가 느껴
막고굴 제308굴은 수나라 때에 처음 조성되었지만, 11세기 전반 돈황을 장악했던 회골(回鶻)인이 다시 벽화를 장식하였다. 주실로 들어가는 통로의 한 벽에는 왠지 친근한 모습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사진1). 챙이 넓은 삿갓, 몸에 들러붙은 옷, 동여맨 허리와 다리, 발이 드러난 나막신, 검게 그을린 얼굴 등의 행색에서, 먼 길을 떠나온 흔적이 보인다. 그가 짊어진 짐엔 뭔가 둥글게 말린 것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이 사람은 마치 둥그스레한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표정으로, 석실 안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모습이다. 곁을 지키고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간단하게 말하면 내가 아는 이 모든 세상이 하나라는 사실이 명백해지는 일이다. 둘이나 셋이 없이 오직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라는 생각조차도 없는 체로 하나이다. 깨닫고 보면 항상 무엇을 보든, 듣든, 맛보든 일체가 항상 이 하나라는 점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느껴지게 된다. ‘묘법연화경’의 ‘약초유품’에서는 이 하나인 사실을 일상법(一相法) 혹은 일미법(一味法)이라고 칭하였고, 선불교에서는 이것을 또 ‘둘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써서 불이법(不二法)이라고 불렀다.즉, 이 세상을 볼 때 중생은 천가지 만가지
[1708호 / 2023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1707호 / 2023년 1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불교는 마음을 ‘대상을 아는 고유성질을 갖는 법(法)’으로 정의한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으로 하나이지만 어떻게 아느냐에 따라 붓다는 여섯 가지 알음알이[육식;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가 있다고 했다. 여섯 가지 인식기관[육근; 안근·이근·비근·설근·신근·의근]이 각각의 인식 대상 여섯 가지[육경; 색·성·향·미·촉·법]를 포섭하여 만드는 알음알이이다. 불멸 후 부파불교는 17찰나에 걸쳐 특정한 기능을 하는 마음이 일정한 순서대로 일어나면서 인식한다는 사실[17찰나설]과 각각의 마음을 일으키는 마음부수들이 있으며, 마음은
나는 티베트 정부의 대표이며 불교의 수반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는 달라이라마를 독대해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마침 뉴델리에 주재하고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 총리와 친분이 있었기에, 그를 통해서 교섭을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곧바로 그에게 나의 의사를 이메일로 보냈다. 그는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답신을 보냈다. 달라이라마의 비서실장인 텐진 탁라(Tenjin Takla)에게 나의 희망을 알렸으니, 그로부터 연락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약 2~3일
1차 전쟁에서 패하고 1년이 지났을 때, 거울에 비친 이마의 상처를 보고 복수심에 타오른 케밧타는 비제하 왕을 물고기를 낚아 올리듯 애욕으로 낚을 작전을 세웠다. 츄라니 왕의 딸 판챠라 챤디는 최상의 미인이었다. 그는 츄라니 왕에게 판챠라 챤디의 아름다움과 좋은 애교에 관한 시를 짓고 ‘이런 여자를 얻지 못하면 비제하 왕의 왕위는 무엇에 쓰지?’라는 노래를 부르게 하여 비제하 왕의 마음에 애착이 생겼을 때, 그를 데려와 죽이자 하였다. 츄라니 왕이 동의했다. 이 비밀을 츄라니 왕의 침실을 지키는 새 사리카가 들었다.츄라니 왕은 시인
필자에게는 생년월일도 같고 스무 살 적부터 동문수학한 방외지우(方外之友)가 있다. 암도 스님의 인연으로 지학(志學)의 나이에 남쪽 백양사 대중이 되어 진원(眞圓) 학인이라 불렸고, 약관(弱冠)이 되자 ‘운허-월운’이라는 출세의 도대강백(都大講伯)을 마음에 모셔 운악산으로 깃들었다. 사부님께서는 향암당(香庵堂)이라 당호를 내려 강(講)을 전수하시며 게문(偈文)을 이렇게 지으셨다. “시(示) 향암당진원좌주(香庵堂眞圓座主). 당지시인(當知是人) 하담여래(荷擔如來)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좌주’는 경·율·론 3장을 강론
길 끝나는 곳에 서있는 문, 절집이 시작되는 불가의 이름으로 일주문이다.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면, 바로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일러준다. 사천왕 금강역사가 지켜주는 해탈의 문을 지나 대웅전 마당에 올라 초 한 자루 꽂고, 향을 사르고 탑 주위를 돌다 보면 분노와 원망은 사라지고 마음도 평정을 찾게 될 터이다. 나올 때쯤 알게 되는 불가의 가르침 ‘신광불매만고휘유(神光不昧萬古輝猷) 입차문래막존지해(入此門來莫存知解) ‘부처님의 빛은 잠들지 않고 만고에 비치나니 이 문을 들어오면 세상일 알음알이는 내려놓으시라’라는 주련의 참뜻을
이래저래 다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아 보게 된다. 금년도 이제 마지막 달력을 남겨 두니 그렇고, 또 본 연재도 ‘한 둘레’가 끝나고 새로 또 ‘한 둘레’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제1회부터 제9회까지의 연재에서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세계’라는 큰 주제로, ‘화엄경’ 설법에 등장하는 인물과 넓은 세계를 소개했다. 비유하자면 마당도 마련되었고 그 마당에서 뛰어놀 광대들도 모여들었다. 이제 ‘한 판’ 놀아보는 일만 남았다. 그 첫 번째 판의 주제는 ‘수행이론의 총망라’로, 본 연재의 제10회부터 제88회에 걸쳐 ‘화엄경’에 등장하는 각종 수
부처님 가르침을 깊이있게 알고 싶으면, 강의를 듣든 아니면 책을 읽던 간에 일단 누구나 불법 공부부터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맨 처음엔, ‘이 세상 만물은 여러가지 인연의 조합에 의지하여 잠시 모습을 나타냈을 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를 배우게 된다. 더불어 ‘무상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여러 인연들에 의해 연기(緣起)되어 나타났다’는 점도 배운다. 그러기에, 이름은 각각 달리 부르지만, 그 이름 각각이 지칭하는 고유의 실체성이 따로 없다. 이것을 좀 더 전문적 용어로는
지난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후기 일선 사찰의 스님들은 공권력과 지배층으로부터 부과된 각종 잡역으로 하루하루 고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혹독한 노동과 날로 어려워지는 경제적 상황은 승도의 이탈과 사찰의 퇴락으로 이어져, 18세기 후반에는 지역의 거점 사찰에서조차 소수의 스님들만 남아 절을 지키고 나라에서는 그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정조실록’ 31권, 14년 8월23일, “절이 퇴락하고 승려의 수가 적기는 어느 곳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별의별 부역과 이러저러한 갖가지 관청 공납이 번다
카이로에서 버스를 타고 대여섯 시간을 달리면 우리네 일상의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사막에 다다른다. 그즈음이면 누가 어디서 왔건 여자는 히잡을, 남자는 터번을 쓰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밀가루 같은 모래먼지가 머리카락에 따닥따닥 달라붙어 빗질은 커녕 머리 감기도 불가능한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 방문했던 돈 많은 아라비아 왕자들이 한결같이 하고 있던 그 패션은 자연환경이 만들어낸 생존전략이요, 습관이었던 것이다.다시금 몇 시간을 달리면 지구 밖으로 나온 것인지 다른 행성에 온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른다. 화이트사막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