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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노파마 ①

기사승인 2018.01.09  10: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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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자 청혼까지 외면하다니 네가 애비 마음을 찢는구나”

“내 너를 키운 이야기를 하려면 7일 낮밤도 부족할 것이다. 혹여 바스러질까 행여 무너질까 안고 어르고 달래며 보낸 세월이 저 하늘 별빛처럼 선명하다. 네가 조금이라도 이 애비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고집을 꺾고 왕자와의 혼사를 받아들이거라.”

세계 최고 거부 딸로 탄생
눈부신 아름다움까지 갖춰
높은 경지 위해 출가 결심


맛자의 말투에 노기와 회한이 함께 서려 있었다. 그의 말대로 애지중지 키운 딸이었다. 딸 아노파마의 용모는 그 아름다움으로 날 때부터 온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희고 고운 살결, 우뚝 솟은 이마, 깊고 그윽한 눈빛, 베일 듯한 콧날과 붉디붉은 입술. 누가 보아도 이제 막 태어난 아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돈의 융통을 업으로 삼으며 놀라운 수완을 발휘해 ‘세계 최고 거부’라는 명성을 얻은 그였다.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까지 얻었으니 그야말로 남부러울 것 하나 없었다. 더불어 그간 움켜쥐려고만 했던 재산의 용처가 비로소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그는 딸 아노파마를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최고급 소재로 만든 옷에 감싸인 아노파마를 하인 수십 명이 낮과 밤으로 나누어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전국 각지에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진미들이 날이면 날마다 궁궐 같은 그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태양빛에 그을린 적도, 밤바람에 한기 스민 적도 한 번 없이 유년시절을 보낸 아노파마는 용모가 더욱 수려해지며 세상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왕과 대신과 부호의 자식들이 아노파마를 탐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번져나갔다.

하지만 눈부신 외모보다 그의 마음을 더 흡족하게 만든 게 있었으니 아노파마의 심성이었다. 아노파마는 그 누구도 업신여기지 않았고, 단 한 순간도 진중함을 잃지 않았다.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재력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늘 살가운 태도로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혼자 있을 때는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놀라게 했다. 돈을 벌수록 생기를 잃어가며 가물어지는 이들을 숱하게 보아왔기에, 세상 모든 부를 다 가진 딸의 수수한 모습은 흡족함을 넘어 경외심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그런 딸이 성년이 되어서는 응당 치러야 할 혼사를 거부하고 있으니, 맛자는 처음으로 느끼는 배신감에 밤잠을 설칠 지경이었다.

‘존경하는 맛자는 보시오. 그대의 딸 아노파마가 커가는 것을 일찍부터 눈여겨보았소. 이제껏 부모를 잘 봉양해왔고 세간의 칭송이 자자하니 기특하기 짝이 없소. 이제 당신에게 남은 책임이 있다면 아노파마가 좋은 남자를 만나 평생 봉양토록 하는 게 아니겠소.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제껏 구경도 못했을 금은보화를 안겨줄 터이니 아노파마를 나에게 주시오.’

며칠 전, 아노파마에게 왕자의 편지를 읽어준 뒤 딸의 표정을 보았을 때 그는 짙은 슬픔을 목격했다. 언제나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만을 안겨주던 딸의 생소한 모습이었다. 나아가 딸이 혼사를 거부하겠다는 말까지 내뱉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앞서 대신과 부호의 자식들이 혼사를 제안했을 때 먼저 거부했던 맛자였지만, 왕자와의 혼사는 이야기의 결부터 달랐다. 딸이 왕비가 된다는 것은 곧 권력이 생긴다는 의미였다. 권력은 그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

“너는 지금 이 애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다. 머잖아 왕이 되어 세상을 호령하게 될 왕자 아니더냐. 무엇을 더 얻겠다고 이 혼사를 외면하겠다는 말이냐. 너를 그토록 아끼고 아껴왔건만 오늘 너의 말을 들으니 지난 세월이 한스럽게 느껴지는구나.”

한동안 말없이 고개 숙이고 있던 아노파마가 문득 얼굴을 들어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버님. 왕자의 전언을 듣고 결심이 섰습니다.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오늘 저는 돈으로 살 수 없고 권력으로 쟁취할 수 없는 드높은 경지를 위해 떠나려 합니다. 다만, 집을 나서기 전 그 이유를 말씀드리는 것이 마지막 의무라고 여깁니다. 이제부터 아버님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아노파마는 한층 깊어진 눈으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김규보 법보신문 전문위원
dawn-to-dust@hanmail.net

[1423호 / 2018년 1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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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보 dawn-to-dus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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