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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호 울산대 연구교수

기사승인 2018.02.12  10: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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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과 포용 겸비한 사고 실천하는 것이 불자다운 삶”

   
▲ 김준호 교수는 “부처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의 의미를 보고 이것이야 말로 내 삶을 가꾸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믿고 실천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금강경'의 메시지”라고 강조했다.

‘금강경’은 반야계열의 경전으로 분류됩니다. 반야라는 말은 크게 보면 ‘지혜’라는 의미입니다. ‘지혜롭게 산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이는 “불자답게 산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불자 이전에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혜가 중요하다는 말이 이 경전의 가장 큰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지혜일까요? 이 지혜의 성격이 ‘금강’입니다. 금강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첫째는 무엇이든 끊어낼 수 있는 다이아몬드와 같다, 지혜를 갖고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 해결해 낸다, 지혜로 번뇌를 해결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 때 지혜로 번뇌를 해결한다는 것은 요즘 치유의 개념과 가깝습니다. 금강은 반야인 지혜로 내 마음의 문제인 번뇌를 모조리 해결한다는 뜻을 상징하는 말이 됩니다.

한가지 생각을 전체로 여기면
다른 판단 인정하기 어려워져
생각의 차이 인정한다는 것은
‘집착하지 않음' 실천하는 것

불교 설명하는 언어 고정화돼
의미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사용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내 삶을 가꾸는 데 도움 돼야


금강의 원어에 따르면 또 한 가지 해석은 ‘번개’라는 뜻입니다. 마치 번개가 한번 내리치면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고 없애버리듯이 내가 어떤 생각을 내어서 하나의 시각이나 대상이나 판단으로 사물을 보려고 하는 관념들, 즉 한 쪽으로만 보려고 하는 관념들의 틀을 확 깨어버린다는 뜻이 됩니다. 나는 젊다 또는 늙었다, 나는 남자다 또는 여자다, 나는 선생이다 또는 학생이다, 나는 동양인이다 또는 서양인이다 등 여러 가지 시각과 관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보는 위치에 따라서 이 관점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한계가 있다는 뜻이지요. 그것을 마치 번개가 그 어떤 사물도 다 깨어버리듯이 내 생각의 한계를 확 깨어버린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렇게 절대화하지 않는 시각에 대해 다시 번개라는 상징을 쓴 것이지요.

경전의 도입부를 보겠습니다. 수보리 존자가 “보살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됩니까?” 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 대답하는 형식으로 내용이 전개됩니다. 여기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입니다. 이 말을 요즘 표현으로 바꿔보겠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이런 마음을 가져야 보살이 된다. 남자이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관점, 여자이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관점, 한국인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관점, 미국인이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관점 등 이렇게 성별에 의해 또는 국적에 의해 보는 생각이 다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데 이 다름을 절대화시켜서 다른 다름을 보지 못하는 것을 경계해야 된다.”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생기는 관점들을 하나의 생각이 아니라 전체 생각이라고 판단해 버리면 다른 판단을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생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들어간다, 생각의 한계를 자각한다, 생각을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하나의 생각일 뿐이라고 관점을 확장하면 생각이 그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곧 ‘집착하지 않음’이라는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금강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상(相)’이라는 말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은 모습/특징에 따라 생겨나는 생각 또는 관념입니다. 특정한 느낌 및 감정을 구성하는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상이 우리의 생각을 좌우하기 때문에 내가 대상을 보고 ‘이 대상은 이런 특징을 갖고 있구나’ 라는 생각, 이것이 항상 문제를 일으킵니다. ‘금강경’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라는 표현은 이 경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부분입니다. 직역하면 “만약 존재하는 모든 상을 상이 아니라고 본다면 부처님을 본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풀이하자면, 어떤 모습을 보고, 그 대상의 특징을 보고, 그 대상의 느낌을 보고, 차이를 보고, 이것을 토대로 해서 판단을 내는 것이 현실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올바르게 인지하고, 판단과 생각의 한계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관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나온 실천이 바로 앞서 말씀드린 ‘집착하지 않음’ ‘생각을 머물러 있지 않음’ 입니다. ‘집착하지 않아야 된다’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니까 집착하지 않음이라는 실천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 삶을 가꾸어 나가자고 제안하는 것이지요.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무조건 옳다’고 전제하고, ‘부처님 말씀이니까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이것이야 말로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해 믿음을 갖는다’, 이렇게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교리라는 것도 우리 삶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지, 교리이기 때문에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가 바뀌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을 해보고 새롭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오랜 세월동안 불교를 설명하는 언어가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무상’ ‘무아’ ‘중도’ ‘연기’ 등의 용어들만 써왔지 이 단어들의 의미를 일상어로, 현대어로 풀어서 쓰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힘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다고 여기기 쉽지만, 자신의 일상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선택과 판단에서 불교적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든든한 지침으로 작용하고 있는가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불자들은 흔히 상에 얽매이면 안 된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상(相)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움츠리게 만듭니다. 대상에서 모습을 파악하는 것, 이를 토대로 특정한 느낌에 따라 판단을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그렇게 해서 하나의 방향성을 갖게 된 생각, 이른바 관념화된 생각을 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판단을 하는데 이 판단의 근거가 되고 토대가 되는 출발점이 바로 상인 것입니다. 이 판단이 우리들의 삶을 행복으로도 불행으로도 이끄는 하나의 조건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을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금강경’에서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정리를 하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형색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 삿된 길을 걸을 뿐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는 표현입니다. 형색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부처님의 경우처럼 특별한 위치에 있는 인물의 경우에는 가르침의 내용보다는 ‘모양 값’ ‘이름 값’ ‘자리 값’ 등이 하나의 판단을 내리는 조건으로 기능하기 쉽습니다. 이 문제는 특히 종교계에서 흔히 발생하는 것인데, 가르침의 내용을 파악하기 보다는 교주님이 이야기하신 것이니까 곧바로 믿어버리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다보니, 종교에서는 가르침의 내용보다는 대중을 휘어잡는 능력이 크게 작용하기 쉽습니다. 그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따라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모습에 끌려가는 것은 경계해야 할 부분인데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색으로 보거나 음성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가르침의 의미를 보고 이것이야 말로 내 삶을 가꾸어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믿고 실천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금강경’의 메시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금강경’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면 ‘무단’ ‘무멸’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생각이 전개될 수 있는 두 가지 방향성을 말하는 것인데요, 이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허무하다, 이쪽으로 생각이 이어질 수 있고, 또 한 가지는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이 상황이 계속 될 것이라는 등 생각이 전개되는 방향은 한쪽으로만 내달리기 쉬운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서 정리한 것이 불생불멸, 부단불상, 불일불이, 불거불래로 나타납니다. 모두 우리의 사고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이것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관점입니다. 관점이라는 것은 우리가 대상을 볼 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나의 좋은 감정을 어떤 대상에게 투영할 때 초점을 맞추면 그 대상이 크게 보입니다. 또 싫어하는 대상, 미워하는 대상에게는 내 미움의 감정을 투영하게 될 때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관점을 갖는다는 말은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다른 것과 달리 좀 더 특별한 대우를 해준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든 생각이나 판단이나 감정들은 다 관점에서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관점을 갖는다는 말은 선택한 대상을 크게 보고 나머지는 다 버린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내가 한 사람을 본다고 한다면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기준일 때에는 옳을 수 있지만 다른 기준을 적용시키면 그 생각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 생각이니까 옳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아니라고 여기기가 쉽습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관점을 어떻게 보아야 그 한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일까요?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이다 멸이다, 크다, 작다, 맞다, 아니다 등 상대적 판단에 대해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이 판단을 내리는 전제가 무엇인지, 조건이 무엇인지, 이 사람은 지금 어떤 상황에서 이 판단을 내리는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결론이 아니라 원인, 조건, 토대, 상황, 맥락을 더 중시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초기불교에서는 ‘연기’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항상 결과로서가 아니라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겼는가라는 이해, 이러한 사유가 바로 연기입니다. 이와 같은 연기적 사유를 토대로 탄력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관점이 바로 ‘중도’입니다. 중이라는 말은 그대로 풀면 ‘가운데’이지만 이 가운데라는 말을 다시 들여다 보면 ‘경계에 서서 양쪽을 본다’라고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저는 ‘중도’라는 말을 “비판과 포용을 겸비 한다”라고 다시 설명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생각이 맞는지, 당신의 생각이 맞는지 일단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황입니다. 어떤 주장이 어떤 전제에서 어떤 의도로 나왔는지 살펴보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생각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조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생각을 이루게 되는 원인, 조건, 토대, 상황, 맥락이 가장 중요합니다. 생각은 하나의 재료에 따라 생각이라는 작용이 전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의 재료가 되는 것이 혹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지 판단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결론적으로 비판과 포용을 겸비한 사고를 실천하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비결이라고 강조한 것이 바로 ‘금강경’의 가르침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으로 정리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강의는 2월8일 부산 여래사불교대학에서 진행된 김준호 교수의 ‘금강경 강의’를 요약한 것입니다.

[1428호 / 2018년 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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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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