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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가풍 진작·호국정신 계승, 그것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소명”

중앙종회, 3월29일 만장일치로
의현 대종사 팔공총림 방장추대
불교중흥 위한 신심·원력으로
한국불교 변화 이끈 중심 인물

의현 스님은 굳은 신심과 원력으로 어떤 역경 속에서도 자신이 발원한 일들은 꼭 성취해왔다. 올해 구순을 앞둔 스님은 호국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대구 동화사에 사명대사 박물관과 교육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의현 스님은 굳은 신심과 원력으로 어떤 역경 속에서도 자신이 발원한 일들은 꼭 성취해왔다. 올해 구순을 앞둔 스님은 호국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대구 동화사에 사명대사 박물관과 교육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조계종 중앙종회가 3월29일 팔공총림 동화사 방장에 임담의현 대종사를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의현 대종사의 삶은 파란만장했던 현대한국불교사와 궤를 같이한다. 열세 살 되던 해 향곡 스님을 만나 봉암사결사에 참여했다. 당시 봉암사에는 청담, 성철, 자운 스님 등 당대를 대표하는 선지식들이 꺼져가는 한국불교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분투했다. 옛 선사가 ‘땅에서 쓰러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라’고 했듯, 부처님 법이 퇴색된 곳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를 외치면서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스님은 일찍이 봉암사결사를 통해 출가수행자의 본분이 수행에 있음을 한 땀 한 땀 마음에 새겨나갔다. 향곡, 성철, 자운, 청담 스님 등 선지식에게서 출가자의 기개와 당당함도 배울 수 있었다.  봉암사결사는 어떻게 출가자로 살아갈지에 대한 일생의 기준점이 됐고, 시련이 닥칠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이 되어줬다.

한국불교의 정체성 회복을 기치로 전개된 불교정화운동 과정에서는 “율장정신을 회복하는 것만이 한국불교를 중흥할 수 있는 토대”임을 각인했다. 이후 문경 대승사, 영천 은해사, 대구 동화사 등 주지를 차례로 맡아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사찰을 복원하거나 망실된 사찰재산을 되찾는 데 주력했다.

스님은 1969년 12월 서른셋의 나이에 중앙종회의원에 당선된 뒤 3~8대 중앙종회의원에 선출됐고, 1980년대에는 월주, 초우, 진경 스님 등 40대 중진그룹과 더불어 종단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격동의 1980년대는 의현 스님에게도 시련의 시간이었다. 1980년 신군부가 자행한 10·27법난의 만행을 규탄하다 보안사 서빙고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81년과 1983년 두 차례에 걸쳐 중앙종회의장에 선출됐지만 종단 내부의 분열과 그에 따른 혼란으로 두 번 모두 채 1년이 못 돼 물러나야 했다. 이 같은 쓰라린 경험은 스님이 향후 종단운영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설정하게 한 배경이 됐다.

스님은 1986년 8월 제25대 총무원장 취임과 동시에 불교악법 철폐, 불교방송국 개국, 중앙승가대 인가대학 승격 등을 발원했다. 전국 사찰을 옥죄는 불교재산관리법을 폐지해 한국불교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교세 확장을 위한 방송국 설립과 중앙승가대 인가대학 승격은 한국불교의 숙원과제이기도 했다. 이 같은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면 불교의 자주화는 요원했고, 외부 세력에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권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는 타종교에 밀려 결국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불교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조선시대 호국과 호법을 위해 위법망구의 길을 걸었던 보우대사나 사명대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은 불교계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 나섰다. 해인사 승려대회를 개최해 불교자주화를 외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일이 정치인들을 만나 설득했다. 그 결과 불교재산관리법 폐지, 불교방송국 설립, 중앙승가대 인가대학 승격 등을 모두 이뤄냈다. 재임기간 중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하며 1988년 북한의 박태화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 위원장과 한 달간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한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법회를 개최했다. 그 공로로 국민훈장모란장을 수훈했다. 한중불교문화교류를 통해 한중수교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스님은 통합종단조계종이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4년 임기를 채웠으며, 재임까지 이뤄낸 최초의 총무원장이 됐다. 

그러나 스님은 1994년 종단의 민주화 과정에서 빈척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도 미국, 스리랑카, 몽골, 인도 등지를 찾아 한국불교를 알렸다. 계맥이 단절된 스리랑카 비구니들을 위해 1996년 인도에서 비구니 수계식을 진행했고, 2015년 인도 우따라 쁘라데쉬주 수바흐르티 종합대학에 처음으로 불교대학을 설립해 인도불교 재건에 앞장섰다. 어떤 역경에도 발원한 일들을 꼭 성취해내겠다는 스님의 굳은 신심과 원력이 만들어낸 결과다. 어떤 상황에서나 호국, 호법의 한결같음은 주변을 감동시켰다.

“방장스님의 정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국불교중흥의 외길을 걸어오신 분이다.”(동화사 주지 능종 스님) “한국불교 현대화의 토대를 닦은 스님이다.”(대구 정법사 주지 혜정 스님) “방장스님을 수십 년간 지켜보며 느낀 것은 늘 하심하고 참회하고 정진하는 선지식이라는 점이다. 스님은 한국불교의 발전을 이끈 주역이다.”(지리산 전 심적선원 선원장 덕원 스님) “혹독한 역경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주변에는 한없이 너그럽고 자상한 큰스님이시다.”(장세철 동화사 신도회장)

세수로 구순을 앞둔 스님은 새로운 불사를 준비 중이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킨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동화사에 사명대사 박물관과 교육관을 건립하는 일이다. 스님은 “팔공총림의 수행가풍을 진작하고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선양하는 일에 앞장설 것이다. 그것이 제게 주어진 마지막 소명”이라고 강조했다. 한국불교계가 다시 팔공총림 새로운 변화와 도약에 주목하고 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677호 / 2023년 4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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