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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왜 간화선을 간화선이라 못 부를까

  • 데스크칼럼
  • 입력 2024.03.18 14:38
  • 수정 2024.03.18 15:35
  • 호수 1721
  • 댓글 7

김호성 동국대 교수 이메일로
‘선학 쇠퇴’의 원인 분석하며
“명상으로 무분별하게 개념 확장
선의 영역·특성 무너뜨렸다” 지적

‘홍길동도 아닌데 왜 선을 선이라 부르지 못하고, 간화선을 간화선이라 부르지 못할까요?’

‘동국대서 선학 사라진다’는 법보신문의 기획 기사가 보도된 후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가 기자에게 보낸 메일은 간명하게 문제를 지적하고 있었다.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이렇다.

‘어느 땐가부터, 명상과 선을 구분하지 못하고, 선을 선이라 못하고, 간화선을 간화선이라 못하고 명상이라 했습니다.…선도 명상일 수 있고, K명상이라 해도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행해지는 명상들 속에는 선과 다른, 선과 합쳐져서는 안 되는 명상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의 메일은 부드러운 언어로 비교적 짧은 편이었지만, 그 지적은 매우 날카롭게 ‘선학 쇠퇴’의 본질을 지적하는 동시에, 불교계에 만연한 행태를 간파하고 있었다. ‘선’ 또는 ‘간화선’을 명확히 규정해 지칭하지 않고 명상, 또는 K명상이라는 단어를 유행처럼 사용하며 무분별하게 개념을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선과는 다른, 혹은 선과 합쳐서는 안 되는 분야까지 흡습됐고, 결국 선의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는 지적이다. ‘선학과는 아니지만 정확히 문제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이 해결의 실마리가 아닌가 해서’라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지만 ‘선의 대승적 연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 등 선학에도 조예가 깊은 김 교수의 제언은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또 하나의 핵심을 선명하게 짚고 있었다. 불교학자의 깊은 고민과 혜안을 전해준 김호성 교수님에게 지면을 통해 감사드리는 동시에 사적 메일을 공개한 데 대해 깊은 양해를 구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평가받는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가 내가 사는 세상의 한계를 규정한다”고 했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뿐 아니라 행동의 범위와 행태까지도 규정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뜻이다. 이는 언어, 좀 더 좁게는 단어가 사라지면 그 단어가 규정하던 대상의 정체성, 개념뿐 아니라 넓게는 그 행동까지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반대의 현상도 가능할 것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독재 ‘빅 브라더’가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이러한 이유다. 빅 브라더는 의사 전달 도구인 언어를 통제하면 인간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언어가 사라지면 인간의 의사, 생각도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렵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언어가 사라지면서 한 민족이 사라지는 일도 드물지 않다. 만주족은 중국을 손에 넣고 청나라를 세워 한족을 지배했지만 청말에 이르러서는 황제조차 만주어를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만주어가 사라지면서 오늘날 만주족을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은 신분증에 표시된 민족 구분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주족의 유전자는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그를 만주족이라고 규정할 사고도, 행동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념을 좁혀 단어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불교에서는 천사, 장로, 천당, 예배 등의 단어가 사실상 사라졌다.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하던 불교 용어를 가져가 적극적으로 사용했고, 그러는 동안 불교는 그 단어들을 지키지 못했다. 결국 ‘천사경’이라는 경전 명칭으로까지 사용되던 천사는 불교에서 사라졌고 장로, 천당, 예배 등과도 영영 멀어지게 됐다. 선 또한 이런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남수연 국장
남수연 국장

간화선, 조사선의 선수행은 명상과 다르다. 선이 대중적이지 못하다고 해서, 어렵다는 인식이 있다고 해서 명상이라는 단어로 무분별하게 대치하거나 포장해서는 얻을 것이 없다. 김 교수는 말한다. ‘공자님도 이름을 바로 하라고 했는데, 이 명칭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추락은 막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여래를 고타마라 불러서는 안 된다.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을 벗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 

이름을, 명칭을 명확히 하는 것, 불교를 올곧게 세우는 출발이다. 이제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교계는 간화선을 간화선이라 부르자.

namsy@beopbo.com

[1721호 / 2024년 3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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