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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아름다운 내력-배한봉

기자명 동명 스님

고구마는 시절인연을 기다렸다

무생물인 줄 알았던 고구마
눈뜰 날은 언제일까에 집중
봄이면 삐죽삐죽 싹 내밀어
봄은 침묵하는 겨울서 비롯

부엌 구석 자루에 담긴 고구마
삶아 먹으려고 꺼내보니
삐죽삐죽 싹이 돋아 있다
어둠 속에서
몸으로 온몸으로 생명을 싹 틔운
침묵의 비명이
내 몸을 찌른다
이 한 뿌리가 내뻗은 줄기로
밭 한 고랑이 풍성하겠고
내년 겨울도 풍성하겠지
종자가 된 고구마
봄은 이렇게 준비하는 거라고
마음의 밥은 이런 거라고
한 수 뜨겁게 가르쳐준다
(배한봉 시집 ‘주남지의 새들’ 천년의시작. 2017)

고구마는 겨우내 가만히 명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내 방 한구석에는 고구마 보관장치가 있었다. 보관장치 이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름은 잊어버렸다. 멍석을 재료로 원통형으로 만든 고구마 보관장치는 제법 커 고구마가 떨어져갈 무렵에는 내가 들어가 고구마와 함께 앉아 있을 수도 있었다.

나는 고구마가 무생물인 줄 알았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기에 무생물이거나 죽은 줄 알았다. 그러나 고구마 보관장소가 바닥을 보일 무렵까지 남아 있는 고구마를 살펴보면, 작은 틈바구니를 비집고 살며시 기어 나오고 있는 새싹을 발견할 수 있다. 고구마는 죽지도 않았고 무생물도 아니었음을 작은 싹이 증명해준다. 눈을 꼭 감고 미동도 않은 채 앉아 있었던 고구마가 사실은 명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내가 눈을 뜰 날은 언제인가?”하는 화두에만 집중한 채 고구마는 시절인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내 시절인연을 기다려 이른봄 싹이 튼 고구마를 쪄먹으려고 시인은 자루를 열었다. 고구마는 저마다 삐죽삐죽 싹을 내밀고 있었다. 이때 시인은 고구마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 “몸으로 온몸으로 생명을 싹 틔운/ 침묵의 비명”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했던 고구마 농사를 생각해본다. 먼저 봄에 싹을 내민 씨고구마를 밭에다 심어 줄기를 자라게 하고, 그 줄기를 일정 길이로 잘라 밭갈이를 잘한 밭에 심으면 된다. 시인은 “이 한 뿌리가 내뻗은 줄기로/ 밭 한 고랑이 풍성하겠고/ 내년 겨울도 풍성하겠지”라고 상상해본다.

실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겨우내 명상에 잠겼던 고구마가 이른봄 슬며시 내미는 새싹 안에 다 있다. 인연은 무르익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때로는 침묵할 필요가 있다는 것, 침묵하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가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치가 고구마 새싹 하나에 다 들어 있다.

고구마의 인연은 고구마만의 것이 아니다. 고구마는 대표적인 구황작물(救荒作物)이다. 구황작물은 곡식을 대신하여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다시 말해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든 농한기에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구제해주는, 재배할 때 비교적 손이 덜 가는 작물이다. 겨우내 고구마가 침묵을 지키며 명상한 결과 살짝 내민 새싹 하나에 수많은 생명체를 살리는 인연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고구마가 보여주는 인연은 부처님 가르침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시인은 경전을 읽지 않고도, 고구마의 새싹을 보는 것만으로도, 약동하는 생명의 봄은 침묵하는 겨울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우리 마음을 살찌우는 밥은 오직 고요히 하나의 화두에만 몰두하는 것임을 통찰한다.

배한봉 시인만 고구마 스승을 통해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이준관 시인은 “삶이라는 것도/ 저렇게 고구마처럼 땅에 묻혀 있는 것”(‘고구마를 캐는 사람과 만나다’)임을 깨달았고, 최남균 시인은 “고구마는/ 잎과 줄기와 알몸/ 그뿐”(‘고구마 꽃’), 활짝 꽃을 피운 적이 없으니 자식들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와 같은 생을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 내 방 한구석에 있었던 커다란 고구마 보관소가 부처님 법음 가득한 법당이었으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단지 그 시절 내 방에서 겨우내 호흡을 같이했던 고구마를 상상하며, 화두에 몰두하는 고구마의 반쯤 감은 눈을 고요히 명상할 수는 있겠다.

동명 스님 시인 dongmyong@hanmail.net

[1721호 / 2024년 3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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