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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본인 목사가 바라본 한국 개신교의 초기 모습

한국 교회 미래 예측한 일본 목사

1922년 다카조 목사 기고
조선 기독교, 호객행위 지적
선교사 말 신의 말처럼 여겨
기독교 정신에서 멀어질 것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22년 11월호 ‘조선'에는 “조선 기독교의 장래”라는 흥미로운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1907년 10월 1일에 설립된 평양조합교회의 목사인 다카하시 다카조가 쓴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기독교회, 일본조합교회, 일본메소디스트교회, 일본성공회가 전국 도회지에 교회를 세우고 있었다. 일본인 목사의 시선으로 본 조선 교회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당시에 도청 소재지가 있는 도회지에는 500명 이상 집회할 수 있는 교회당이 반드시 2개 이상 있었고, 경성과 평양에는 10여 개 교회당이 있었다. 많은 교회에 남녀 사립학교가 부속돼 있었고, 일요일에는 일요학교가 열렸다. 일요일에는 아침 10시·오후 2시·저녁에 걸쳐 3번의 집회가 있었고, 수요일 저녁에는 기도회가 열렸고, 순회전도회·청년회·부인회 등 별도 집회도 있었다. 신자들은 함께 소리 높여 찬송가를 부르고, 열렬히 기도하고, 목사의 설교를 듣고, 2전·5전·10전의 헌금을 냈다.

처음부터 개신교는 ‘학교의 종교’이자 ‘집회의 종교’였다. 충실한 신도가 교회의 모든 집회에 참여하려면 한 달 가운데 절반의 시간을 교회 집회에 투자해야 할 정도였다. 같은 신조를 가진 신자들이 같은 종교교육을 받으면서 ‘종교의 시간’을 공유한 것이다. 이처럼 개신교는 신자들을 계속 종교 집회에 참여시킴으로써 ‘고독이 없는 종교’라는 낯선 종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의 개신교는 학교를 배경으로 하여 세력을 강화하고 있었으므로, 학생을 교회에서 제외할 경우 개신교의 세력이 3분의 1로 줄어들 정도였다. 또한 학생은 의무적으로 교회에 출석해야 했고 학부형의 출석도 요청되었다. 초등교육부터 가능한 한 아동을 ‘종교의 시간’에 최대한 노출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인 전략이었다.

개신교 신자인 니이지마 조(新島襄)가 세운 일본의 도시샤(同志社) 사립학교의 경우, 신앙을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신교를 믿지 않는 학생이 더 많았다고 한다. 일본 개신교는 교육을 신앙 전도의 방편으로 삼지 않았지만, 조선의 개신교는 기독교 전도의 방편으로 학교를 이용하는 미션 스쿨을 지향했다는 것이다.

최초 전래 후 불과 40년 만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2500여 개의 교회당과 18만5000여 명의 신도를 자랑했다. 그리고 개신교는 처음부터 양적 성장의 풍토 속에서 신자의 시간을 온통 기독교의 시간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다카하시는 미국 영향을 받은 조선의 기독교는 호객 행위를 하는 상점과도 같다고 비판한다. 다카하시는 조선 개신교의 가장 큰 단점은 편협한 ‘종파 근성’이라고도 지적한다. 또한 교회 출석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라고 주장하거나, 선교사 말을 신의 말처럼 여기는 풍토도 폐단으로 지적된다. 

다카하시는 종교란 인격 깊은 곳에서 양심의 자율에 따라 영계의 진리를 호흡하는 것이므로, 정치운동이나 문화운동이 아니라 생활 문제라고 강조한다. 또한 교회가 확장할수록 금전과 규칙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에, 조선의 개신교는 점차 기독교의 본령에서 멀어질 것 같다고 비판한다. 그는 종교와 교육의 분리, 종교와 운동의 분리를 강조하면서 종교의 좌표를 철저히 개인의 자리로 이동시키고 있다.

다카하시는 장래에 조선 개신교는 혼이 빠진 형해로 타락하고, 결국 사상이 저급한 사람들의 우상숭배로 남을 거 같다고 말한다. 신자가 많을수록 기독교의 정신에서 멀어지는 역설에 빠질 거라고 전망하고 있는 것이다. 다카하시는 팽창을 지향하는 미국식 개신교는 ‘진짜 기독교’가 아니라는 인식, 조선의 열등한 종교 풍토에 적합한 방식으로 조선의 기독교가 타락하고 있다는 식민주의적 인식을 그대로 노정하고 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다카하시의 조선 개신교 비판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그만큼 개신교는 꽤 오래 ‘종교적인 정체’를 겪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일본 교회의 이러한 시선이 한국 개신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앞으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1721호 / 2024년 3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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