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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은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

기자명 혜민 스님

6. 경계 체험의 착각

구도자가 찾는 주인은 부동심
고요한 주인은 곧 ‘지금 여기’
‘지금 여기’란 성품 깨 있으면
눈앞의 모습에 상관하지 않아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이지만, 많은 구도자들이 수행의 과정에서 잊고 실수하는 부분이 바로 “왔다 갔다 하는 손님을 주인으로 착각”하는 경우이다. 즉 없었다가 새로 생겨난 신기한 경계 체험을 하게 되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깨달음의 체험인가 보다’라고 여기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경험을 붙잡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경계 체험의 내용은 어느덧 변해서 사라지고 만다. 원래부터 있었던 주인이 아니고 객으로 찾아온 경험은 인연이 다하면 언젠가는 떠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진실에 밝지 못한 구도자는 손님의 경험이 주인인 줄 착각해서, 그 경험을 다시금 재현해 보려고 하거나, 아니면 그 좋았던 경험을 항상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하지만 의상 스님의 ‘법성게’에 보면 모든 법은 본래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다(諸法不動本來寂)고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즉, 구도자가 찾는 주인은 본시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인 것이지, 없었던 것이 새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손님과도 같은 경험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간단하고도 깊은 진리를 깊이 통찰해서 수행의 경험에 적용하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항상 있어왔던 움직이지 않는 주인에게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새롭게 찾아온 허망한 손님에게만 관심이 간다. 깨달아야 하는 것은 변덕스러운 손님이 아니고 본시 부동한 주인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주인이란 말인가? 지금부터는 달을 가르키는 방편의 말을 써서 독자들께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보려고 한다. 모든 구도자가 깨닫고 싶어하는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주인은 바로 ‘지금 여기’이다. 우리는 한순간도 지금 여기를 떠나 본 적이 없다. 낮이든 밤이든 우리는 항상 지금에 있고, 이 세상 어디를 가도 눈앞에는 항상 여기이다. 물론 모양의 세상은 계속해서 바뀐다. 시간상으로 보면 새벽의 모습과 대낮의 모습, 한밤중의 모습은 다 다르다. 더불어 장소의 입장에서 보면 서울 여기 모습과 제주 여기 모습도 다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모습들은 계속해서 변화하지만, 우리가 항상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은 움직이지 않고 부동하다. 더불어 마음을 ‘지금’으로 향해 도착하는 곳이나 ‘여기’로 향해 도착하는 곳이 일치한다. 말은 둘이지만 동일한 한 곳이 낙처인 것이다.

마음이 끝임없이 변화하는 모양에 홀리면 항상 부동한 ‘지금 여기’를 느낄 수가 없다. 하지만 모양에 마음이 없고 언제나 ‘지금 여기’라는 성품에 깨어 있으면 눈앞의 모습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게 된다. 왜냐면 그 어떤 모습의 상황이 펼쳐진다고 해도 우리는 ‘지금 여기’를 떠날 수도, 잃어버릴 수도, 훼손할 수도 없기에 안심이 되는 것이다. 더불어 모든 상황이 ‘지금 여기’를 떠나서 펼쳐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런 상황들에 ‘지금 여기’가 제약을 받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지금 여기’ 자체는 그 어떤 상황의 구속감 없이 항상 자유로우며, 변화하지 않고 부동하며, 정해진 모양이 없어 텅 비고 공하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를 우리 같이 한번 느껴 보자. 한 순간이라도 ‘지금 여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던가? 과거를 회상해도 ‘지금 여기’에서 하고,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해도 ‘지금 여기’서 하지 않는가? 회사를 가도 ‘지금 여기’이고 해외여행을 가도 눈앞은 항상 ‘지금 여기’이지 않는가? ‘지금 여기’는 정해진 시간이나 장소가 아니기에,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지금 여기’를 변함없이 느낄 수 있다. 

더불어, ‘지금 여기’는 내가 노력해서 새롭게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부동한 주인이자 본래 성품인 것이고, 문득 깨달을 수 있는 것뿐이다. 또한, 내가 노력한다고 내가 느끼는 ‘지금 여기’가 다른 사람의 ‘지금 여기’보다 더 좋아지는 것도, 더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에게 아주 평등하게 주어진 것이라,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지금 여기’를 느끼면서 ‘지금 여기’라는 말을 떼어버리고 그냥 한번 딱 느껴 보자. 어떤가? 텅 비어 있지만 우주 가득 충만하지 않는가? 움직이지 않는 ‘지금 여기’ 하나가 언제나 변화없이 독야청정(獨也靑靑) 하지 않는가?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721호 / 2024년 3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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