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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국불교와 일본불교-하

귀족불교 비판하며 신불교 일어났지만 다른 양상으로 전개

▲ 일본 가나가와현의 가마쿠라 청동대불.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때 조성됐다. 청동대불의 높이가 11.32 m에 이른다.

한국불교와 일본불교는 9세기 초부터 확실히 다른 길을 가기 시작하였다. 한국불교는 실천불교인 선종이 새로 전래되어 주류적인 종파의 하나로 발전하였던 데 비하여 일본불교는 밀교적인 성격의 진언종과 천태종이 새로 전래되어 주류적인 종파가 되었다. 그리고 12세기 말경에 이르면 두 나라의 불교계는 각각 새로운 불교혁신운동이 전개되면서 완전히 다른 모습을 나타냈다. 한국에서는 1170년 무인정권이 수립되고, 일본에서도 뒤이어 1185년 가마쿠라(鎌倉)막부가 성립되었는데, 무인들이 집권하였다는 비슷한 정치적 상황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모습은 전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대개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흐름과 비슷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던 데 비해 일본불교는 방향을 크게 달리하여 독자적인 길을 걸어갔다. 12세기말 고려 불교계에서는 귀족화·세속화를 비판하면서 결사(結社) 형태의 불교혁신운동이 전개됨으로써 불교계의 전반적인 변화를 겪는 가운데, 특히 불교의 주류가 학문불교인 교종(華嚴宗·法相宗)에서 실천불교인 선종(曹溪宗·天台宗)으로 전환되었으며, 교선통합의 사상체계를 수립하였다.

한국과 일본 양국 12세기에
동시에 무인집권 시기 도래

정치혼란 사회적 불안 속에
새로운 구원의 가르침 갈망

일본은 불경이나 교학 중에
하나만 선택 나머지는 배격

한국은 선·화엄 받아들여
철학적이며 지적 불교 지향

일본의 선은 지적 요소 대신
간명하고 직절한 선을 추구

한편 일본의 불교계에서도 역시 헤이안불교의 귀족화·세속화를 비판하면서 이른바 가마쿠라 신불교가 성립되었는데, 선종과 정토신앙 등의 실천적인 불교가 주류를 이루었던 점은 같은 시기의 고려불교와 외형상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불교의 내용이나 성격, 그리고 전개양상은 전연 다른 모습이었다. 가마쿠라시기에도 불교의 중심은 여전히 화엄종과 법상종, 천태종과 진언종 같은 구불교였다. 그러나 헤이안말기 이후 계속되는 정치혼란과 사회불안 속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구원의 가르침을 갈망하게 되었다. 가마쿠라시기가 되면 내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헤이안시기 구귀족들의 정토신앙 대신에 현세의 민중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불교가 나타났다. 이러한 신불교의 여러 종파는 어지러운 말법(末法)시대의 고통 받는 민중의 구제가 공동의 목표이며, 구제받기 위해서 어려운 불경공부나 수행을 하지 않아도 되며, 많은 불경이나 교학 가운데 하나의 가르침만을 선택하여 그것만을 전념하면 된다는 특색을 가졌다.

신불교의 주요한 종파는 정토계통의 정토종(淨土宗)·정토진종(淨土眞宗)·시종(時宗), 법화계통의 일연종(日蓮宗), 선종계통의 임제종(臨濟宗)·조동종(曹洞宗) 등 6종인데, 이들 종파들은 각각의 종지를 뚜렷이 내세워 정토계통에서는 염불만을, 법화계통에서는 ‘법화경’만을, 선종계통에서는 좌선만을 내세우고, 여타의 사상이나 신앙은 일체 배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토신앙이나 법화신앙, 선의 내용과 성격도 각각 일본불교만의 특색을 나타내줌으로써 중국이나 한국의 불교와는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일본불교를 성립시켰다. 신불교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된 종파는 정토종인데, 개조인 호넨(法然, 1133~1212))은 1175년 전수염불(專修念佛), 즉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외우기만 하면 부처의 원력에 의해 무식하고 어리석은 범부도 서방의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정토종을 창립하였다. 정토종의 타력이행(他力易行)의 교설은 자력성도(自力聖道)의 귀족불교에 대항하는 민중불교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엔랴쿠지(延曆寺)와 고후쿠지(興福寺) 등의 구불교측으로부터 격렬한 비난과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무사나 농민 사이에 포교하여 신불교의 대표적 종파로서의 위치를 점하였으며, 뒤이어 성립되는 정토진종과 시종의 원천이 되었다.

호넨의 제자인 신란(親鸞, 1173~1262)은 전수염불을 계승하여 1224년 정토진종을 개창하였다. 호넨이 구불교측의 탄압을 받고 도사에 유배되었을 때에 신란도 에치고에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었다. 그 뒤 히타치를 중심으로 관동지역의 포교에 전념하면서 정토진종의 근본 교의를 설명하는 ‘교행신증(敎行信證)’을 저술해서 아미타불에 의지하여 오로지 염불을 외우면 그 순간 극락왕생이 약속된다고 설파했다. 또한 악인이야말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을 주장하면서 주로 하층농민을 비롯한 민중을 대상으로 포교하였다. 정토계통의 신불교로서 가장 늦은 1276년에 시종을 개창한 잇펜(一遍, 1239~1289)은 “일대 성교가 오늘날에는 모두 멸진되고 오직 나무아미타불만이 남았다”고 하여 정토교 가운데서도 가장 간결한 염불의 교의를 설하였다. 신자의 중심이 상급무사였는데, 무사들의 다도나 서화감상 같은 문화생활에도 기여하였다. 시종의 전성기는 가마쿠라말기부터 무로마치전기이며, 이후 정토진종의 급격한 팽창으로 인해 지방의 신자를 뺏기면서 쇠퇴하였다.

다음 니치렌(日蓮, 1222~1282)에 의해서 1253년 창립된 일연종은 오직 ‘법화경’만을 근본경전으로 받드는 종파인데, 그 경전의 내용이나 천태종의 교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니고, 오직 ‘법화경’의 제목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는 5자의 이름 자체에만 의미를 부여하여 절대화하고 신앙하였기 때문에 ‘법화지상주의(法華至上主義)’, 또는 ‘제목종교(題目宗敎)’라고 불려질 정도였다. 따라서 정토신앙이나 참선 같은 다른 불교의 종지는 전연 받아들이지 않았다. 니치렌은 ‘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7자를 외우면 그대로 부처가 되고, 국민 모두가 ‘법화경’을 믿으면 국토는 그대로 불국(佛國)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은 1260년 당시의 집권자인 호죠 도키요리(北條時賴)에게 제출한 건의서인데,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정법은 ‘법화경’이라고 단정하고 빨리 이 경전을 중심으로 한 정법세상을 만들지 않으면 인심이 험악하게 되고 국가는 어지러워져서 마침내 외적의 침입을 받아 국가가 멸망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른 종파의 교의를 배격하고 이 가르침만을 국교로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다른 종파의 반감을 사고, 또한 막부로부터도 박해를 받아 2차례 유배를 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나중에 사면된 뒤에도 신념을 바꾸지 않고 미노부산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육성하였으며, 하급무사나 상인들에게 널리 유포되었다.

한편 가마쿠라 신불교의 여러 종파 가운데 당시의 고려불교와 직접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종계통뿐인데, 고려 지눌(知訥, 1158~1210)의 조계종과 일본의 에이사이(榮西, 1141~1215)의 임제종, 도겐(道元, 1200~1253)의 조동종의 불교를 비교하여 보면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일본에 선종이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8세기 나라시기부터였으나, 독립된 종파로 성립되지는 못하였다. 일본에 선종이 본격적으로 전해지는 것은 에이사이가 1191년 송(宋)의 임제종 황룡파(黃龍派)의 선종을 전수받고 귀국하면서부터이다. 한국에서 도의(道義)가 821년 당(唐)으로부터 귀국함으로써 선종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지 무려 370년 만이다. 에이사이는 귀국하여 선을 포교하려고 했으나, 히에이산을 중심으로 하는 천태종 승려들의 반대에 부딪쳐 조정으로부터 활동을 금지당했다. 1195년 하카타에 쇼후쿠지(聖福寺)를 건립하고, ‘흥선호국론(興禪護國論)’을 저술해서 선종의 교의를 설파했다. 1199년부터 구불교세력이 약했던 가마쿠라에서 포교하여 2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源賴家)의 귀의를 받아 가마쿠라에 쥬후쿠지(壽福寺), 교토에 겐닌지(建仁寺)를 세웠다.

임제종은 화두 참구를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방법을 썼는데, 이러한 가풍이 가마쿠라의 상급무사들의 기풍과 합치돼서 주로 무사 사이에 크게 유포되었다. 조동종의 도겐은 임제종의 개조인 에이사이가 세운 겐닌지에서 선을 배우고, 1223년 송에 가서 5년 동안 머물면서 조동종을 전수받았다. 그는 1227년 일본에 돌아와 좌선을 닦는 것이 그대로 깨달음이라고 논파한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저술하고, 에치젠에 들어가 에이보지(永平寺)를 창건하고 수행에 전념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말법사상에 반발하여 오로지 좌선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세속을 떠난 엄격한 수행을 요구하여 주로 하급무사들의 신봉을 얻었다. 에이사이와 그를 계승한 도겐으로 인해서 일본 불교계는 비로소 밀교인 진언종의 비로차나법(毘盧遮那法)과 천태종의 지관업(止觀業)으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조사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도겐은 중국 조동종의 묵조선(?照禪)을 받아들이고,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고려에서는 조동종의 묵조선은 주목하지 않고 주로 임제종의 간화선 위주로 받아들였다. 당시 고려 불교계에서 가장 주목받은 중국 불교의 인물은 임제종의 간화선을 집대성한 대혜종고(大慧宗?)였다. 당시 중국 선종의 주류는 임제종의 대혜파였으며, 대혜파는 문필을 중요시하여 지배계급인 사대부계층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도겐은 문필(文筆)에 의하여 진리를 표현하려는 자세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그 대신 대혜의 간화선을 반대하였던 묵조선의 노선에 공감하였다. 그러나 남송(南宋) 말기부터 원(元) 시대에 걸쳐서는 일본의 불교계에서도 임제종의 간화선을 받아들였다. 또한 남송의 관사(官寺)제도를 받아들여 선종의 5산(五山)을 중심으로 하여 선수행과 함께 유교와 한시 등도 공부하여 이른바 5산문학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일본으로부터 중국에 갔던 승려들도,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일본에 온 승려들도 주류파인 대혜파가 아니고 대혜파에게 눌려 있던 형세의 임제종의 호구파(虎口派)에 연결된 인물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당시 일본에는 사대부와의 교류를 중시하고 학문과 문학에 열중하는 대혜파의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적 기반이 성립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 일본에는 그와 같은 한문의 문예를 자기의 존재이유로 하는 사대부라고 하는 계층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같은 시기의 고려 불교계에서는 ‘대혜어록’을 받아들여 무인 집권기의 가장 대표적 승려였던 지눌이 간화선과 교선통합사상을 성립시켰는데, 그 선의 내용이 도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나타내주었다. 도겐의 조동종은 ‘지관타좌(只管打坐)’라고 해서 오직 좌선만 하는 선을 내세웠다. 도겐의 조동종은 다른 교학과의 통합을 거부하고 선명하게 참선에만 전념하는 불교인데 비해 같은 시기 지눌의 조계종은 선의 입장에서, 불교의 교학, 특히 화엄을 받아들여 선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통하여 선의 철학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선 자체는 결코 철학이 아니고 수행의 방법이지만, 그 선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 고려불교는 선을 대단히 지적인 면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일본 불교의 선은 지적인 요소가 미약한 반면에 간명 직절한 선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무사들의 단순 직절한 성격에 선이 쉽게 연결될 수 있었고, 무사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해 주는 불교로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일본문화의 무사(武士)적 전통 가운데서 선은 대단히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고 발전해온 구불교의 사원들은 헤이안시대부터 점차 세속화되어 장원을 소유하고 승병을 길러 세속적인 권력을 다투었다. 그들은 무장을 하고 다른 절과 싸우기도 하고, 지방관과 다투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조정이나 막부에 무력시위를 통하여 요구를 관철시켰다. 특히 천태종의 엔랴쿠지와 온죠지, 법상종의 고후쿠지, 화엄종의 도다이지 등의 사찰은 승병의 수도 많고 강력했다. 반면 가마쿠라 신불교는 농장의 경영 같은 경제기반의 구축 대신에 무사나 농민·상인 등을 대상으로 한 대중포교 방법을 퉁해 교세를 확장해 갔다.

가마쿠라 신불교의 이러한 특성이 1868년 메이지유신이후 신불분리(神佛分離)와 폐불훼석(廢佛毁釋)의 태풍 가운데 상대적으로 피해를 적게 받았으며, 이후 일본의 대외진출에 호응하여 “해외전도(海外傳道)”에 앞장서게 하였다. 1876년의 개항 이후 정토진종을 비롯한 정토종 ·일연종·조동종 등이 경쟁적으로 조선침략의 첨병 역할을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개항 이후 일본불교의 한국침투 사실은 근대불교 편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shilrim9@snu.ac.kr


[1393호 / 2017년 5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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