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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상

“일체 현상은 인연화합의 결과일 뿐 실체는 없습니다”

▲ 강병균 교수는 “사람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사람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는 것처럼 절대로 원인이 되는 것이 없이 결과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 무아·연기론”이라고 강조했다.

무아론에 대해 강의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무아론은 사실 쉽다고 하면 쉽고 또 어렵다면 굉장히 어려운 이론입니다. 그래서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방법도 있고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아론은 사실 연기론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무아가 곧 연기입니다. 용수보살이 ‘중론’에서 열심히 설파하셨듯이 무아가 곧 연기입니다.

무아·연기는 현대과학 정수
무아·연기 아니면 설명 안돼
무아 알면 자비심도 생겨나

사람이라고 여기는 존재는
오온의 연기 작용이 만든 것
초월적 존재 있다는 건 오산

무아·연기는 현대 과학의 정수입니다. 무아·연기가 아니면 현대 과학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무아라는 것은 일체에 상주불변하는, 변하지 않고 항상 있는, 실체가 없다는 그런 이론입니다.

연기론이라는 것은 생명이건 무생명이건 일체 현상 모두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돼서 생길 뿐이지, 따로 그걸 주재하는 실체가 없다는 이론입니다. 무아나 연기론을 알게 되면 거기서 자비심도 나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세울 자기가 없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요. 요즘 많이들 얘기하는 ‘더불어 살기’도 저절로 가능해지겠지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이상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앨리스가 어떤 고양이와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고양이가 서서히 희미해지더니 사라져 버립니다. 신기하게도 허공에 이빨만 드러내고 웃는 모습으로 딱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앨리스가 굉장히 신기해하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나. 자기는 지금까지 웃지 않는 고양이를 본 적이 있지만 고양이 없는 웃음은 본 적이 없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없는데 사람 모습만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지는 전등은 없는데 전등불만 남아 있다든지, 초는 없는데 촛불만 남아 있다든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웅전에 초는 없는데 촛불만 남아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좀 더 과학적으로 얘기하자면 ‘물질은 없는데 중력만 있을 수 있는가’ ‘자석은 없는데 자력만 있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 무아론이나 연기론에 의하면 절대 그런 일은 없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사람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사람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는 것처럼 절대로 원인이 되는 것이 없이 결과만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설명한 것이 바로 무아·연기론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시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고려 후기 문인으로 이규보가 있습니다. 그분은 말년에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이 백운거사였습니다. 그분이 읊은 천하의 명시가 있습니다. ‘영정중월(詠井中月)’이라는 시입니다. ‘우물 속의 달을 노래함’이라는 의미입니다.

산승탐월색(山僧貪月色)
병급일병중(幷汲一甁中)
도사방응각(到寺方應覺)
병경월역공(甁傾月亦空)

산에 사는 스님이 달이 탐나서. 물을 긷는 김에 달도 같이 길어서 물병 속에 넣었습니다. 산사에 다다르면 비로소 깨달으리. 물을 비우면 병도 공한 것을.

그분이 어떤 계기로 이런 걸 썼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후대 사람들의 특권은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대로 상상해 봤습니다.

스님이 하루는 탁발을 하러 마을로 나갔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 돌다가 어느덧 해가 저물었습니다. 그런데 목이 말라서 우물에 가서 물을 길으려고 합니다.  두레박을 내리다 보니 우물 바닥에 휘영청 달이 있는 겁니다. 그 달빛이 너무 고와서 물을 긷는 김에 달도 길어 가지고 자기 물병에 다 집어넣습니다. 산사에 돌아와서 호롱불을 켜고 조심스럽게 대접에 물을 따릅니다. 그런데 달이 없습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달이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걸 노래한 게 이 시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이 기가 막히지요.  병을 기울여서 물을 비우면 병도 공하고, 병은 원래 빈 것 아닙니까? 달도 없지요.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하늘에 달이 뜨고 땅에 물이 있어야지 영상이 생기지 않습니까? 둘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절대 생길 수가 없지요. 그걸 불교에서는 연기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상주불변하는, 실체가 없이 텅 빈 것을 파초의 비유를 들어서 얘기를 합니다. 파초의 줄기를 아무리 벗겨도 결국 속에는 아무것도 없지요. 그 텅 빈, 그러나 속이 텅 비었지만 분명히 파초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공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규보는 달을 통해서 불교에서 얘기하는 공을 기가 막히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독일 이야기입니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것을 들어 보셨습니까? 동화인데 원 제목은 ‘피터 쉴레밀의 기적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내용은 피터라는 사람이 악마에게 자기 그림자를 팝니다. 대신 끝없이 황금이 나오는 가죽 주머니를 받습니다. 거래를 끝낸 악마는 피터의 그림자를 똘똘 말아서 들고 가 버립니다.

이후 피터는 굉장히 부자가 됐는데,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여러분 누구하고 길을 같이 가는데 이 사람 그림자가 없으면 이상할 것 아닙니까.  친구들이 다 떠납니다. 피터가 낙심을 하고 악마한테 찾아가서 다시 부탁을 합니다. 그림자를 돌려 달라고 했더니 악마가 조건을 겁니다. 당신 영혼을 주면 그림자를 돌려주겠다. 그런데 피터는 자기가 그래도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거절합니다. 그리고는 황금 주머니도 버리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자연에 대한 탐구로 위안을 삼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아까도 얘기를 드렸지만 사람과 그림자를 분리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림자를 사람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연기법을 부정하는 겁니다. 그림자라는 것은 태양과 사람의 연기 작용이지 따로 분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오온을 떠나서 따로 자기가 있다고 얘기를 안 하셨습니다.

오온이라고 하면 색수상행식인데 색은 우리 몸입니다. 그 다음에 수상행식은 우리 정신입니다. 쉽게 말하면 수는 감정이고 상은 생각, 행은 의지, 식은 기억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 생각, 의지, 기억을 떠나서 따로 자기가 없다고 얘기를 하셨습니다. 오온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거기에 자기라는 건 없지요. 결국 자기라는 것은 오온의 연기 작용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 오온을 떠나서 초월적인 어떤 존재가 있어서 그 존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게 아니냐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만 팔천리 어긋난 것입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윤회를 얘기할 때 상속(相續)으로 얘기합니다. 즉 전 찰나의 오온을 인으로 해서 후 찰나의 오온이 생긴다고 얘기합니다.

사실 우리 몸도 보면 매순간 끝없이 변하므로 그것도 크게 보면 윤회의 일종입니다. 만약 생을 바꿔서 윤회를 하더라도 그것은 상속이지, 중간에 어떤 존재가 있어서 전생의 업을 짊어지고 후생으로 가는 게 아니다고 설명을 합니다.

‘나가세나왕문경’ 혹은 ‘밀린다왕문경’에 보면 그런 얘기들이 나옵니다. 윤회라는 것은 장사가 팔을 펴듯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는 이유는 어떤 주체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온의 화합으로써 사람이라는 게 존재할 뿐이지 그걸 떠나서는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본다고 하는 것도 결국 연기 작용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뇌 속에 어떤 화면이 있겠습니까? 영상이 있겠습니까? 영화관 같은 자막이 있어 가지고 거기 여러 풍경들이 상영이 되겠습니까? 안 된다는 거지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뇌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DVD나 CD에 보면 그 속에 영상이 들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습니다. 오직 0과 1이라는 기호 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DVD 녹화기나 이런 데 집어넣으면 거기서 비로소 영상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뇌 속에도 아무런 영상이 없습니다. 사람의 뇌는 뇌신경세포 1000억개와 1000조개의 뇌 회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뭘 보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가 뭘 보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불경에 놀라운 얘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근·경·식 삼자의 연기 작용이라고 얘기합니다. 근은 시각기관인 눈을 얘기하고, 경은 시각 대상, 식은 본다는 작용인데, 요즘 말로 하면 시각중추의 작용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경에서 또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근과 경이 연해서 식이 생긴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식이 미리 있는 게 아니고 근과 경이 연해서 그 인연으로 식이 생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현대 과학에서 얘기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식이라는 것은 미리 존재하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미리 존재하는 것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뿐입니다. 우리 뇌, 뇌 신경세포, 뇌 회로 그런 것들이 하드웨어고 그다음에 뇌 신경세포가 어떻게 배선이 돼 있느냐는 게 소프트웨어가 됩니다. 그럴 때 그걸 이용해 가지고 우리가 보게 되는 거지요.

예를 들면 우리가 장미꽃을 본다, 벚꽃을 본다 그러면 벚꽃에 반사된 빛이 우리 수정체를 통과해서 망막을 때립니다. 그러면 그 망막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시각 신경세포에 생체전기가 발생합니다. 다시 이 생체 전기가 생체 전깃줄인 신경을 타고 뇌로 갑니다. 정확히는 뇌 시각중추로 갑니다. 그러면 뇌 시각중추에서 그동안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모아 놓은 것과 비교를 합니다.

그런데 그 이미지라는 건 영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기호로 존재합니다. 그것과 비교를 해서 ‘아, 이게 벚꽃이구나’ 하고 인식을 합니다. 그래서 식이라는 것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이라는 게 미리 존재해서 그것이 보지 않나 이렇게 생각들을 합니다. 그것은 원래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크게 잘못된 거지요.

예를 들면 참나가 보고 듣고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연기법에 위배됩니다. 그러면 옛날 사람들은 왜 그렇게 귀신이 보거나 참나가 뭐 한다거나 그런 생각을 했느냐 하면 기본적으로 눈의 구조나 그다음에 시각 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뇌의 구조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들이 지금 세상에 태어났으면 그런 얘기 안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계속)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이 내용은 강병균 교수가 5월17일 국회불자모임인 정각회 초청 강연회에서 ‘무아론’을 주제로 강의한 것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1394호 / 2017년 6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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