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인천 송도에서의 마지막 강의다. 5주 동안 인천 연수구에 있는 해돋이도서관에서 불교미술에 대해 강의를 했다. 그런데 다섯 번을 왔으면서도 강의하느라 바빠 한 번도 정원을 산책하지 못했다. 드디어 오늘 그 다섯 번째 강의를 마치는 날이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다는 기약도 없으니 그 멋진 정원을 꼭 걸어봐야겠다. 걷다 시원한 그늘이 나오면 벤치에 앉아 산들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어야겠다. 1시에 강의가 끝나면 점심 먹으러 가기에 바쁠 것이다. 강의 전에 걷는 게 좋겠다.
보행에 불편주는 통유리 건물
쉼 제공하는 도서관 옆 공원
우리는 무얼 남기며 살아왔나
나는 많은걸 받고 살아왔는데
내 자식들에게 무얼 남겨줄까
누군가 쉬고 싶은 공원이기를
그런 생각으로 집에서 조금 일찍 나왔다. 마음이 다급했던 것일까. 빨라도 너무 빨리 왔다. 강의 시간은 11시인데 9시 반에 도착했다. 가방 속에 책을 넣어 왔으니 잠깐 산책하다 책을 보면 금방 시간이 갈 것이다. 드디어 오늘 벼르고 별렀던 공원 산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강의실이 있는 도서관 2층 베란다에서 공원을 내려다 볼 때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여유롭게 걷는 사람들이 무척 부러웠다. 짙푸른 나무 위로 거침없이 쏟아지는 6월의 태양과, 강렬한 햇살이 닿지 못한 어두운 그늘이 대비를 이루면서 공원의 여름은 더욱 싱싱해 보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공원에서 읽는 즐거움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였을까. 송도는 신도시를 만들면서 공원 옆에 도서관을 지었다. 머리에는 지식을, 몸에는 휴식을 얻을 수 있는 멋진 공간이다. 공원에 심은 나무들이 얼마나 울창하던지 송도가 매립지 위에 인공적으로 세운 도시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다만 공원 너머에 세워진 고층 빌딩들만이 이곳이 신도시임을 상기시켜주었다. 만약 나무들이 아니었다면 이 도시는 얼마나 삭막했을까.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커튼 월(curtain wall)’ 공법으로 건물을 짓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커튼 월’은 유리, 금속판 등의 외장재로 건물 외벽을 커튼처럼 덮는 공법이다. 건축 용어로는 ‘비내력 칸막이벽’인데 속칭 통유리로 부른다. 통유리로 지은 건물은 이음새가 보이지 않아 외관상 깔끔해 보이고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건물의 위용을 드러내기에 최고의 공법이라는 뜻이다. 서울시청 신청사를 비롯해 용산구청사, 금천구청사, 경기도 성남시청사 등 관공서에서 통유리를 선호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통유리 건물은 화려한 외관과는 다르게 그 부작용이 심하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워 열손실이 많기 때문이다. 통유리 건물은 예외 없이 에너지 저효율 건물로 악명이 자자하다. 유리벽이 햇빛을 반사해 주변에 피해를 주는 ‘광(光)공해’도 심각하다. 통유리 건물 앞을 지날 때 햇볕이 반사되어 눈이 찌를 듯 아팠던 기억을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것이다. 눈 찔림 현상은 단지 그 앞을 지나간다는 이유만으로 막무가내로 당해야 하는 폭력이나 다름없다. 또한 유리로 된 건물이니만큼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 사생활 침해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부작용을 노출하면서 무분별한 커튼 월 시공에 대한 비판이 여러 차례 제기되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통유리 건물은 늘어만 간다.
송도에 세워진 건물들도 예외는 아니다. 송도국제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도시가 계획된 만큼 커튼 월 공법으로 세워진 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이런 건물들 사이를 걷다 보면 내가 ‘피로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위력적인 빛의 반사에 지쳐 있을 때 공원의 푸른 나무를 만나는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세상에는 통유리커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녹색커튼도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동안 공원을 산책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바탕에는 이런 사연이 들어 있었다.
드디어 도서관 옆 공원에 들어왔다. 도서관 건물을 지나 조금 걷다 보니 장미의 정원이 시작된다. 누가 이렇게 가꾸었을까. 장미는 노란색, 주황색, 분홍색, 빨간색, 흰색 등 지상에서 만들 수 있는 온갖 색이 뒤섞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이미 절정을 넘기고 바닥에 떨어진 장미도 더러 보인다. 장미 주변에는 흰색 찔레를 심었다. 찔레는 장미보다 키가 훨씬 커 마치 찔레꽃으로 담장을 만든 것 같다. 찔레는 꽃봉오리가 끝에 피는 장미와 달리 허리에 띠를 두른 듯 나무중간에 꽃이 달렸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장사익은 찔레꽃 향기가 너무 슬퍼 목 놓아 울었다고 하는데 나는 꽃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마냥 웃는다. 꽃밭 사이를 거니는 동안 시큼한 장미꽃 냄새와 찔레꽃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가 사라진다. 나는 이 순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충만하다. 통유리커튼 앞을 거닐었다면 결코 누릴 수 없는 충만함이다. 꽃에 취해 한 시간쯤 걸었을까. 다리가 퍽퍽해 벤치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저 멀리 느티나무 아래 넓은 평상이 보인다. 서늘한 그늘 아래 앉아 잠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딱 그 지점에 있다.
평상에 앉아 신록의 황홀함에 취해 있자니 우리가 과거에 비해 참 잘 살게 되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비단 송도에서만 느낀 생각이 아니다. 여러 도시에 강의를 하러 다니다 보면 서울이고 지방이고 할 것 없이 주민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랄 때가 많다. 특히 곳곳에 세워진 멋진 도서관과 잘 다듬어놓은 공원을 만날 때면 더욱 그렇다. 우리 어머니 세대만 하더라도 세 끼 밥 해결하는 것이 최고의 화두였는데 우리 세대는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공원에 앉아 망중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 세대 사람들은 나보다 더 게을렀을까. 나는 그분들보다 더 부지런해서 잘 살게 되었을까. 장미를 심는 데 아무런 힘도 보태지 않은 내가 장미를 심느라 땅을 파고 호미질을 한 선배를 대신해 마음껏 호사를 누리고 있다. 호사스러움이 과분하다 보니 내가 이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을까, 잠시 아득해진다. 나는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내 자식들이 살아갈 세상에는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지 고민해본다. 부디 내가 남겨줄 그 무엇이 통유리처럼 다른 사람 눈을 찌르는 불편한 것이 아니기를. 그 누군가가 쉬고 싶을 때 편안하게 마음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장미 정원 같은 공간이기를. 녹색커튼이 드리워진 공원벤치에 앉아 감사한 마음으로 장미를 바라본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396호 / 2017년 6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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