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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봉암사 결사

기자명 이병두

불교적 방식으로 이끌어낸 큰 개혁

▲ 왼쪽부터 청담, 향곡, 성철스님.

“첫째, 삼엄한 부처님 계율과 숭고한 조사의 유훈을 부지런히 닦고 힘써 실행하여 구경(究竟)의 큰 결과를 원만히 빨리 이룰 것을 기약한다. 둘째,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 각자의 사견은 절대 배척한다. 셋째,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공급은 자주자치(自主自治)의 표지 아래에서 물 기르고, 땔나무 하고, 밭에 씨 뿌리며 또 탁발하는 등 어떠한 어려운 일도 사양하지 않는다. 넷째, 소작인의 세조(貰租)와 신도들의 특별한 보시에 의한 생활은 이를 단연히 청산한다. 다섯째, 부처님께 공양을 올림은 열두시를 지나지 않으며 아침은 죽으로 한다. 여섯째, 앉는 차례는 비구계 받은 순서로 한다. 일곱째, 방안에서는 늘 면벽좌선(面壁坐禪)하고 서로 잡담을 엄금한다.…”

1947년 문경 봉암사서 시작
성철 등 젊은 선승들이 주도
‘부처님 법대로 살자’고 다짐
정권에 기대지 않은 것 특징

1947년 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청담·성철·자운·향곡 등 30~40대의 젊은 선승들이 “부처님 법대로 살자”며 뜻을 모아 공표한 ‘공주규약(共住規約)’에서 다짐한 약속이다. 출가수행자라면 이렇게 살아가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들이다. 그런데 왜 깊은 산속에서 결사(結社)를 하고, 이런 다짐을 불교 집안 안팎에 공표해야 했을까.

조선 시대 500년 동안 억불(抑佛)의 설움을 겪으면서도 버텨냈던 한국불교였지만, 일제강점기 35년의 상처는 너무 크고 깊었다. 특히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일본의 일부 승려들이 황실(皇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되는 사실을 부러워하며 적극적으로 친일의 길을 걸었던 이들이 그 허상(虛想·虛像)을 벗어던지고 본래 자리를 찾기는 아주 어려웠다. 해방이 되었다고 하지만, 일제에 적극 협력하며 기득권을 누리던 승려들은 바뀌지 않은 채 여전히 고위직을 차지하며 불교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불교와 수행자의 본래 자리를 되찾자!”고 외쳐본들 대답 없는 메아리에 그치고 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결코 뚫지 못할 것만 같아 보이던 그 단단한 장벽을 돌파하는 길이 열렸다. 신라 말 썩어가는 불교를 살려낸 힘이 정치의 중심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에서 솟아났듯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깊은 산중 봉암사에서 의지를 다진 젊은 선승 몇 명이 새 길을 열었다. 현대 한국 불교를 살려낸 힘은 이 결사의 주체들이 “우리 요구를 들어 달라” 팔을 휘두르며 목청을 높이지 않고 오히려 올곧은 ‘수행자의 길’을 가는 가장 불교인다운 방식을 택한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위 사진은 청담·향곡·성철 스님이 봉암사 결사 중 함께 산행을 하다가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스님들에 따라다니는 ‘무서운 호랑이’의 이미지보다는 누구든 편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이 소박하고 환한 미소가 편안하게 다가오지만, 세 분이 높은 산 위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면서 무슨 말씀을 나누었을까 상상해보면 매우 엄숙한 순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숙연해진다.

10년 전인 2007년에는 봉암사 결사 60주년기념법회와 학술세미나를 열며 “결사의 정신을 이어가자”고 다짐하였고, 70주년을 맞는 올해에는 각기 자신의 입장에서만 봉암사 결사를 거론하며 자기주장을 합리화하는 말이 넘쳐나고 있다. 정신의 계승은 없고 이용하는 이들만 남은 것이다.

첫째 다짐에서 약속한 것처럼 모든 스님이 구경열반을 이루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 각자의 사견은 배척”하고, “정부 예산 지원과 약값 등의 명목으로 신도들이 전하는 특별 보시에 의한 생활은 단연히 청산”하며, 정치권력에 기대어 종권을 잡아보겠다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405호 / 2017년 8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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